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 20세기 격변기 불교와 기독교 종교회의와 음악

기자명 윤소희

인위적 선율 기독교…불교는 말씀 자체가 음악

불교·기독교, 서로 닮은 듯 다른 것 중 하나가 결집·공의회
결집, 붓다 가르침 재확인…공의회, 신학적 체계 정립 과정
20세기 공의회 이후 미사곡 쏟아졌듯 결집 통해 율조 정립

1)1954~1957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제6차 결집. 2)1962~1965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모습.
1)1954~1957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제6차 결집. 2)1962~1965년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모습.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닮은 듯 다른 것 가운데 하나가 결집과 공의회다. 붓다께서 입멸하시자 제자들이 그 말씀을 합송하며 불교가 탄생했고, 기독교는 예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며 결성되었다. 여기에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가 달라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애초에 경·율·논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출발한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유대의 신앙으로 출발하여 그리스 철학과 융합하며 점차 교의가 형성되었다. 제행무상·무아의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와 달리 믿음을 전제로 하는 기독교는 이단을 배척하며 신학적 체계가 잡혔는데, 그때마다 공의회가 열렸다. 

최초 회의는 AD50년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이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할례나 율법이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써 가능해짐”을 선포하였다. 325년에 이루어진 제2차, 381년에 이루어진 제3차 공의회는 니케아에서 이루어졌다. 이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이 성립되어 니케아신경(현 사도신경)이 선포되었다. 431년에 행해진 제4차 공의회는 에페소에서 열렸다. 이때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별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배격하였고, 680~681년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7차 공의회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신의(神義)와 인의(人義)가 공존함”을 선포하였다.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에 공의회 인정을 둘러싼 이견이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동방정교회는 제7차 공의회까지만 인정하고, 서로마는 1054년 분열 전에 열렸던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제8차), 십자군 파견이 결정된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거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21차에 이른다. 여러 공의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대품(大品) 성직자의 혼인금지를 선포한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이다. 흔히 가톨릭 사제들은 본래 독신이었던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에 불교의 대처 논쟁과 같은 상황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의회 전통을 고집해오던 서로마교회는 1517년에 이르러 또 하나의 큰 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10월31일 마틴 루터가 교회를 향한 반박문을 발표한 이후 독일어 성경을 출간하였다. 개신교는 예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전례는 폐지하고, 말씀의 전례(성경 봉독과 설교)만으로 예배를 하였다. 개신교회가 자리를 잡아 안정기에 들었을 무렵 슈베르트가 독일어로 된 미사곡을 발표하였다. 그 악곡의 제목이 ‘슈베르트 미사곡’이 아니라 ‘독일 미사곡’이라 한 데서 라틴어의 권위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불교에도 언어를 두고 벌였던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힌두사제들이 자신들의 제사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평민이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석가모니는 당시 문자가 없었던 마가다의 속어로 설법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도 남방의 빠알리(‘경전어’라는 뜻) 경전은 말씀의 소리를 음사한 것이지 문자 본연의 뜻이 아니다. 붓다 입멸 1달 후에 이루어진 1차 결집, 붓다 입멸 100년 후의 2차 결집, 붓다 입멸 236년 후에 아쇼카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3차 결집은 마가다어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붓다 입멸 후 400년경(BC 2세기)에 인도 건타라국 쿠샨 왕조의 가니슈카(재위 73~103년) 시기에 산스크리트어 결집이 있었다.

1875년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이루어진 결집 때는 “세 번째 결집까지의 내용만을 가려서 새로 넣지 말고,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면서 5차 결집이라 하였다. 얼핏 보면 앞서 산스크리트어로 열린 4차 결집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4차 결집으로 인정한 것은 붓다 입멸 후 450년(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진 결집이다. 스리랑카 결집을 주도한 마힌다 장로가 아쇼카왕의 아들인 점에서 3차 결집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4차 결집으로 삼았고, 산스크리트어 결집은 인정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바티칸의 완고함에 대해 젊은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186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이때 시대 상황에 맞춘 교의 변경이 있었지만, 라틴어로 예배하는 원칙은 그대로였다. 1950년대 들어서 이혼과 피임, 다민족 신자들에 대한 변화 요구가 밀려오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이때 각 민족 언어로 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한국에는 국악미사곡이 생겨났다. 1970년대 후반에 한글본 공의회문헌을 구하고 보니 불교대사전과 같은 양장본에 신앙의 근간에서부터 신행의 세세한 지침까지 마치 육법전서와 같이 빼곡한 항목들이 1000여 페이지에 달했다.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불교 전법(傳法)의 위기를 느낀 미얀마는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을 연데 이어, 1954년에는 양곤에서 제6차 결집(Chatta Sangiti)을 열었다. 1957년 마무리된 이 결집은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본까지 참여하여 미얀마 승단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음악적으로 보면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월드뮤직에 의한 미사곡이 쏟아져 나왔듯이 불교도 결집에 의해 율조가 정립되었다. ‘법구경’과 같은 가타(詩)체는 그 자체가 노래였고, 설명조는 랩이었다. 기독교는 인위적으로 선율을 만들었지만, 불교는 붓다의 말씀 그 자체가 음악이었다. 이토록 오묘한 세계가 불교음악인데 왜 한국의 공립합창단은 기독교 노래만 하는가?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이어가 보자.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693호 / 2023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