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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전 승가대학장 용학 스님

“스님은 부처님의 그림자이자 메아리…언행 함부로 해선 안 돼!”

무술 수련하며 불연
20대 해인사로 출가

은해사 승가대학원 1기
무비 스님으로부터 ‘전강’

유튜브 ‘木魚TV’로 전법
화엄‧유마경 등 ‘큰 호응’

‘대승기신론’은 이론 아닌
자신 측량하는 ‘수행서’

현전한 부처님 말씀 듣듯
경전, 지중하게 읽어가야

각성‧통광 스님 대원력
‘종경록’ 번역에 역점 

영명연수 전집 6권도 
한국 최초 번역 기대

범어사 전 승가대학장 용학 스님은 “우리 곁에 각성, 무비, 덕민 스님 등 대강백이 계신다는 건 큰 행운”이라며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어사 전 승가대학장 용학 스님은 “우리 곁에 각성, 무비, 덕민 스님 등 대강백이 계신다는 건 큰 행운”이라며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러한 모든 것(경전)들 가운데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중에서)

마명(馬鳴) 스님은 “중생들이 불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릇됨이 없이 여법하게 실천수행” 하도록 이끌고자 ‘대승기신론’을 썼다. 교계에서는 ‘불교 입문서’로 알려져 있으나 ‘대승기신론’의 마지막 장까지 독파하기란 여간 녹록하지 않다. 대승불교의 반야, 공(空) 사상과 유식 철학을 통하지 않고는 이 명저의 핵심어 ‘진여일심(眞如一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망한 ‘기신론의 바다’에서 밝게 빛나는 등대 하나 서 있다. 범어사 전 승가대학장 용학 스님의 유튜브 채널 ‘용학스님TV 木魚(목어)’다. 한문 원전의 정확한 해석과 비유를 통한 상세한 설명이 압권이다. 동화사·운문사 한문불전대학원에서 강의한 동영상은 물론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강의도 만날 수 있다.
 

용학 스님은 부산 수암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용학 스님은 부산 수암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웠더랬다. 스승은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 결사를 회향한 선사였다. 참 많은 스님이 스승을 찾아와 법담을 나눴는데 귀동냥이었지만 스님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선문답에 왠지 끌렸다. 세속에서 추구하는 물질은 아예 관심 없는 듯 깨달음을 추구하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20대에 해인사 산문을 열고 길상암의 명진(明振)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1986)

무예를 전수해 준 스승에게 출가의 뜻을 전했을 때는 반대했다고 한다.

“사문의 길을 올곧게 걸으려면 때로는 냉정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의 성정으로는 감내하기 어렵다고 보신 겁니다. 그런데 사미계를 수지한 후 인사를 올리니 ‘관음기(觀音氣)가 도는구나! 절이 너하고 맞는가 보다’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관음의 기운이 돈다는 건 자애로운 모습을 지녔다는 뜻이다. 

“당부하셨던 말씀이 생생합니다. ‘편하게 살고자 하면 스님 생활보다 편한 게 없다. 그러나 출가인의 본분사를 다하고자 하면 이 세상에서 스님 생활보다 어려운 게 없다.”

힘겨운 여정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 스님으로 영암임성(映巖任性‧조계종 4·11대 총무원장‧1907∼1987) 스님을 기억했다. 종단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총무원장직을 맡아 혼란을 수습하며 안정을 도모했던 영암 스님은 해인사 주지 때 20개의 전각을 복원하며 지금의 해인총림 설립 토대를 다졌다. 특히 공사(公社)를 엄격히 구분해 모든 일을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 났다. 

“노스님께서는 공금과 사비도 철저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월정사 총무를 맡으셨을 때의 일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노스님께서는 오른쪽 주머니에는 공금을, 왼쪽 주머니에는 사비를 넣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화주 차 길을 나섰던 스님은 새벽녘에야 돌아오셨습니다. 사중 스님이 ‘왜 이제야 오시냐?’라며 물으니 ‘사비가 떨어져 걸어왔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럼 화주는 못 했겠습니다’라며 걱정스럽게 물으니 오른쪽 주머니에서 시주금을 꺼내더랍니다.”

7년간의 노력 끝에 잃어버린 봉은사 땅 6만6000 여㎡(2만여 평)을 되찾은 장본인도 영암 스님이다.

용학 스님은 운동하던 중 왼쪽 무릎의 전·후방, 내·외측 인대가 거의 다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가 결국 선방으로의 길을 막았다.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적멸보궁 3년 기도’에 들어갔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노천당 월하(老天堂 月下·1915∼2003) 스님에게 자신의 기도정진 원력을 고했다.

“방장 스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이 생생합니다. ‘깨달음을 놔두고라도 3년 정진하면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월하 스님이 쓴 ‘대도무문 진리무대’. 
월하 스님이 쓴 ‘대도무문 진리무대’. 

지금의 설법전 자리에 샘터가 있어 천수물을 뜨곤 했다. 그날도 천수물을 뜨려고 갔는데 월하 스님이 서 계셨다. 월하 스님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벽에 걸어 놓고 보라구!” 

월하 스님이 손수 써 내려간 선구가 들어 있었다. 

‘大道無門 眞理無對(대도무문 진리무대). 대도는 허공처럼 문이 없고, 진리는 상대적인 자취가 없다.’

70대의 방장 스님이 이제 막 비구계를 받은 스님에게 평생 화두로 삼을만한 선구를 써 도량에 서서 기다렸다니! 후학을 아끼는 월하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을 담은 족자는 천성산 수암(水巖) 선원에 걸려 있다.

‘대승기신론’은 공(空), 불공(不空), 일심(一心), 진여, 본각, 무념, 지관, 염불, 삼신불(三身佛)등 수행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론서가 아니라 실천수행서가 아닌가.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의 지향점은 하나입니다.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 않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 ‘대승기신론’ 또한 중생과 부처는 서로 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중생 속에 부처가 공존하고 부처 역시 중생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울이 있어야 자신의 몸무게를 알 수 있듯, ‘대승기신론’은 자신을 측량 점검해 볼 수 있는 수행지침서입니다.”

‘용학스님TV 木魚’에서는 ‘화엄경’ ‘종경록’ ‘유마경’ ‘혜능대사 금강경’ 등의 강설이 올라오고 있다, 특히 ‘종경록’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보인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조계종 94 개혁종단’ 이후 교직자 양성이라는 원대한 원력을 품고 설립한 교육기관이 은해사승가대학원이다. 
 

각성 스님의 ‘주심부’ 강의에 자리한 통광, 무비 스님. [용학 스님]
각성 스님의 ‘주심부’ 강의에 자리한 통광, 무비 스님. [용학 스님]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인 통도사 백련암 원산 스님의 추천을 받은 용학 스님은 제1기로 입학했다. 각성, 무비, 통광, 혜남, 덕민 스님 등 당대 내로라하는 대강백으로 교수진을 꾸렸을 만큼 종단적으로 기대가 컸던 교육 불사였다. 특히 각성‧무비‧통광 스님은 ‘탄허 3걸’로 불렸는데 선교에 밝고 내외가 명철해 사부대중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여쭈어볼 스승이 가까이 계신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하나의 원문이 수 갈래로 번역‧해석될 때 무엇을 택할지 고민만 하다 하루가 지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앞이 캄캄할 때 교수 스님에게 여쭈면 참고할 경전과 이론을 제시해 주십니다. 경학의 깊이와 사유의 지평이 확대됨을 그 자리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대강백으로 칭송받는 스님들의 학문적 깊이와 통찰력은 깊고 예리합니다. 일례로 전강 은사이신 무비(無比) 스님이 ‘천리마’라면 저는 ‘조랑말’입니다. 오늘도 여쭙고 또 여쭙니다.”

용학 스님은 은해사승가대학원을 졸업한 후 여천 무비 스님의 강맥을 잇는 전강 제자가 되었다.

“무비 스님께서 통도사 특강에 나선 적이 있는데 학인이었던 저도 참석했습니다. 그때 무비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프로다! 일반 불자만큼 공부해서는 안 된다.’ 저희 전강식 때도 강조하셨습니다. ‘이제는 강사의 자격이 주어졌다. 강사는 어떤 사람인가? 학인보다 2배 더 공부하는 사람이다!’”

당시 어른 스님들은 ‘탄허 3걸’ 중에서도 원조 각성(圓照 覺性) 스님을 유독 지중하게 여겼다. 탄허 스님은 “당대 제일!”이라 했고, 운허 스님은 “200년 3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귀재 중의 귀재”라고 평했다고 한다. 

“각성 스님이 범어사에서 특강을 열면 지리산에 머물던 통광 스님은 한걸음에 달려와서는 무비 스님과 함께 이름표를 달고 맨 앞에 앉으셨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직접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통광 스님이 ‘종경록’ 목판본 100권을 들고 각성 스님을 찾았다. 훗날 후학들이 번역할 수 있도록 원문에 토라도 달아(현토) 달라는 청이었다. 한문 원전에 토를 다는 건 번역의 절반을 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하면 현토에 따라 번역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통광 스님이 토를 달 자신이 없어 각성 스님을 찾아간 게 아닙니다. 자신보다 각성 스님이 더 깊은 혜안을 가졌다고 보셨기에 걸음 했을 겁니다.”

고된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통광 스님은 각성 스님의 보약값을 챙겨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눈도 침침했다. 중도 포기를 결정하고 통광 스님을 찾았다. 각성 스님이 받았던 보약값을 도로 내놓자 통광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약값으로 쓰시면 됩니다. 정 힘이 드시면 내려놓으세요. 몸까지 망가뜨려서는 안 됩니다.”

산사로 돌아온 각성 스님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3년에 걸쳐 완성한 ‘종경록’을 통광 스님에게 전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을 두 강백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리산 칠불사 회주 통광 스님은 그로부터 두 달 후 입적했다.(2013) 현토된 ‘종경록’ 목판본 100권은 용학 스님 품에 안겨졌다. 각성 스님이 용학 스님에게 완역해 달라고 직접 부탁한 것이다. 출판비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요청하면 감수도 맡아준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만한 그릇이 안 된다’라고 생각하니 선뜻 맡기가 두려웠다. 전강 은사인 무비 스님에게 고했다.

“어른 스님 살아계실 때 종이 조각 하나라도 받아야 공부할 수 있네. 하물며 ‘종경록’이라! 자주 친견할 이유가 생겼군. 복이야 큰 복!”

“‘종경록’ 강의를 마치는 대로 출판 작업에 들어가 보려 합니다. 100권 중 36권 정도 정리한 상태인데 각성 노스님 생전에 완역해 봉정하려 나름 애쓰고 있습니다.”

진부한 질문 하나가 스쳤다. 경전은 어떤 마음 자세로 읽어야 하는가?

“책 속의 활자를 읽으려고만 하면 감동하기 어렵습니다. 감동하지 못하면 울림이 없고, 울림이 없으면 체득할 수도 없습니다. 경전을 연 순간 우리 앞에 부처님이 현전하시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평소 후학에게 당부하는 일언이 있다고 했다.

“당장 정직하라! 정직한 사람이 자비심을 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세상을 정토로 가꿉니다. 스님은 부처님처럼 가사를 수하고 있고, 그 누구보다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듣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림자이자 메아리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면 언행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용학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다. [경전연구회 화엄산림법회]
용학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다. [경전연구회 화엄산림법회]

용학 스님은 지난 3월부터 무비 스님을 대신해 스님을 대상으로 한 화엄경 강설법회 ‘경전연구회’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재가불자를 대상으로 한 ‘화엄경 강의’도 부산 문수선원에 개설했다. 끝없는 정진이요 전법이다! 

용학 스님은 각성 스님으로부터 ‘종경록’을 받을 때 ‘영명지각연수선사 전집 6권’도 함께 받았다. (2018) 이 전집이 한글로 번역된 적은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경록 100권 번역’ 불사를 마치면 영명연수 선사의 전집도 용학 스님의 정성으로 세상에 선보이기를 기대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용학 스님은
해인사에서 명진(明振)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1986)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 통도사와 범어사 중강을 맡았다. 조계종립 은해사승가대학원을 졸업하고 범어사 여천 무비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은 후 범어사 승가대학장,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 조계종 교재편찬위원·교육위원·고시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산 천성산 수암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저서로는 ‘불광대사전 전8권 색인집’, ‘불조직지심체요절’ 역주, ‘대방광불화엄경 전80권 대역본’ 등이 있다.

[1693호 / 2023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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