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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59)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5)

의상 외에도 수많은 화엄학승 있었으나 교단 활동 없어 후대 전승 끊겨

의상 법손들 처음엔 화엄학승 일부 불과했지만 9세기 후 주류로 
비 의상계 인물로, 화엄학승으로 분류 가능한 대표 인물이 원효
의상 외에도 당에서 화엄 배워 온 학승들 있었으나 영향은 미미

황룡사지 전경.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일군의 화엄학승들이 있었으나, 독립된 종파나 학파를 구성하지는 못했다.[위키피디아]
황룡사지 전경.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일군의 화엄학승들이 있었으나, 독립된 종파나 학파를 구성하지는 못했다.[위키피디아]

앞에서 의상(625~702)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의상 법손들이 번성하였고, 화엄종이 신라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의상의 법손들 이외에도 상당수 발견된다. 이른바 ‘비의상계’ 인물들은 의상계 법손들과 달리 종파를 형성하고 조직적인 교단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화엄학 연구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계 화엄종에 흡수되면서 점차 잊혀 갔다. 그런데 ‘비의상계’라는 표현은 의상계를 주류로 인정하는 조건에서 사용된 개념이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의상의 법손들이 확실하게 주류로 등장하는 9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되는 것이다.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반까지는 의상과 그 제자들도 수많은 화엄학승들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였는데, 뒷날 화엄종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그 이전의 역사를 소급하여 초기부터 주류였던 것으로 확대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비의상계’의 의미가 어떻든 7세기 중반 이후 150여 년간의 신라 불교계는 유식학과 화엄학이 양립하여 경쟁하였고, 화엄학 안에서도 수많은 인물들이 난립하여 당의 화엄학의 수용, 국왕이나 중앙귀족들과의 관계 등의 여러 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라 중대의 이러한 불교계 상황에서 특히 ‘비의상계’ 인물이면서도 화엄학승으로 분류 가능한 인물이 원효였다. 원효의 불교는 통합불교, 화쟁불교로 평가하여 화엄학과는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교사학계의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원효의 불교사상에서 마지막 도달한 최고 경지는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 즉 화엄사상이었다.

원효(617~686)는 의상의 평생도반 관계였음에도 사상체계의 수립과정이나 교화활동의 전개과정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효의 불교사상체계 수립과정은 3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는 출가 이후 낭지와 혜공 등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법화경’ ‘반야경’ 등을 공부하였고, 또한 신라에 새로 전해오는 ‘섭대승론’ ‘십지경론’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보덕으로부터 ‘열반경’ ‘유마경’ 등을 배웠으며, 원광에 의해 소개된 ‘능가경’ ‘대승기신론’ 등 구역경전들을 폭넓게 섭렵함으로서 신역경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제2기는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현장의 신역경전들을 새로 접하고 그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공(空)·유(有) 대립을 동아시아 불교계의 당면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사상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당 유학을 중도에 단념한 이후 ‘대승기신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마침내 일심사상을 토대로 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였고, 이어 ‘금강삼매경’을 통하여 실천원리를 제시함으로서 제2기의 불교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문무왕 10년(670) 의상의 귀국을 계기로 지엄의 화엄교학이 새로 전래된 것은 원효 불교의 수립과정에서 두 번째의 전기를 마련하여 줌으로써 원효의 불교사상은 제3기로 진입하였다. ‘법계도총수록’에는 원효가 의상과 만났을 때 의상의 교시에 의해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은 것은 범(凡)인가, 성(聖)인가?” 등의 세 가지 의문을 해결했다는 전승을 전해주고 있으며,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서는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전수해온 수전법(數錢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원효가 의상을 통하여 지엄의 화엄학을 접하였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원효는 의상을 다시 만난 이후 12년 동안 ‘화엄경’ 연구에 몰두하여 ‘화엄경소’ 10권을 비롯해 ‘보법기’ ‘화엄종요’ ‘일도장’ ‘대승관행’ 등 5종의 화엄 관련된 저술들을 남김으로서 최종적으로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대중교화의 방법에서도 ‘화엄경’에 의거한 대승보살도의 실천행으로 한 단계 차원을 높이었다. 

원효의 제2기 저술인 ‘대승기신론소’ 종체문에서는 ‘화엄경’을 여러 경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열거하는데 그쳤으나, 제3기의 저술인 ‘화엄경소’ 서문에서는 ‘화엄경’을 “원만무상돈교법문”이라고 규정하여 돈교를 포용하는 원교의 구경 교설의 지위임을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화엄경’을 주석한 본문 가운데서 4교판론을 제시하여 전체 불교를 3승과 1승으로 구분하고, 3승별교에 사제교(四諦敎), 3승통교에 ‘반야경’과 ‘해심밀경’을 배당하였다. 그리고 1승별교에 ‘영락경’과 ‘범망경’, 1승만교에 ‘화엄경’과 보현교를 배당함으로써 소승불교 위에 대승불교의 중관학과 유식학을 하나로 묶고, 다시 그 위에 ‘화엄경’의 동류경전인 ‘영락경’과 ‘범망경’을 배당하고, 최상위에 ‘화엄경’을 위치시킴으로써 ‘화엄경’을 중심으로 하여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시킨 최종의 통합불교를 성립시켰다. 원효의 영향을 받은 법장이 중관학과 유식학을 묶어 대승시교의 단계에 배당하고, ‘화엄경’을 원교의 최고 단계에 위치시켜 최고 구경의 지위를 부여한 화엄종의 5교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원효와 교유하였던 인물 가운데는 대중교화사이면서 사상가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많은데, 법화행자인 낭지, 중관불교의 승조(僧肇)를 이었다고 자부한 혜공, 원효의 주석에 앞서 ‘금강삼매경’의 배열 순서를 잡아 준 대안, 화엄행자인 사복 등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사복은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메고 연화장계로 들어갔다는 설화를 남길 정도로 뛰어난 화엄행자였다. 그런데 원효와 사복은 화엄학자이자 화엄행자로서 무애한 행적을 나타내줌으로써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과 대승보살도를 통한 대중교화에 커다란 업적을 수립하였으나, 제자를 양성하고 교단을 조직하지 않음으로써 후대에 계승되지를 못하고 잊혀 갔다. 반면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서 오로지 화엄교학의 홍포와 제자의 양성에 주력함으로서 후대 화엄종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의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670년 의상의 귀국 이후 지엄을 계승하여 화엄교학을 집대성한 법장(643~712)의 교학, 선종의 대두와 천태종의 부흥이라는 불교계의 변화상황에 대응하여 화엄교학을 혁신한 징관(738~839)과 종밀(780~841)의 교학도 전해진 사실이 확인되는데, 법장과 징관의 교학을 전해온 신라의 화엄학승은 승전(勝詮)과 범수(梵修) 등이었다. 승전은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의상이 귀국한 20여년 뒤인 690년대 초에 법장의 서신과 함께 그의 저술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가 필사하여 가져온 법장의 저술들은 ‘화엄경탐현기’ 20권(2권 미완)을 비롯하여 ‘이십문론소’ 1권 ‘일승교분기’ 3권 ‘신법계무차별론소’ 1권 ‘현의장등이의’ 1권 ‘별번화엄경중범어’ 1권 ‘기신론소’ 2권 등이었는데, 의상은 제자들에게 각각 나누어주고 연구케 함으로써 신라 화엄교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법장의 서신은 신라 불교계에서 의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삼국유사’ 승전촉루조에서는 승전이 귀국한 이후 상주에 갈항사(葛項寺)를 창건하고, 많은 돌해골(石髑髏)를 권속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승전의 제자인 가귀(可歸)는 승전의 법등을 계승하여 ‘심원장’과 ‘화엄경의강’ 1권을 지었다고 전하는데,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 가운데는 심상(審祥, ?∼742)이 있었는데, 성덕왕대 일본에 화엄을 전해주어 일본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심상은 왕명으로 740년부터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에서 ‘60화엄경’에 대하여 법장의 ‘탐현기’에 의거한 강의를 시작하여 매년 20권씩 3년 만에 종강하였다. 그런데 심상은 법장의 제자라는 교넨(凝然)의 설을 부정하고 의상 계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또한 신라인이 아니라 일본의 유학승이었다는 설도 일본학자들에 의해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재검토가 요구된다. 다음으로 범수는 당에 유학하고 소성왕 원년(799)에 귀국하였는데, ‘후분화엄경(40화엄경)’과 징관의 ‘화엄경소’를 가지고 와서 강의하였다. 범수의 행적이나 사상은 불명이지만, 징관의 새로운 화엄교학이 징관 당대에 곧바로 신라에 전래되었던 사실은 주목된다. 그러나 법장의 화엄교학을 전수해온 승전, 그리고 징관의 새로운 화엄교학을 전수해온 범수 등은 독자적인 학파나 종파를 성립시키지는 못하고 단절되어 버렸고, 의상 계통의 화엄종에 영향을 미치거나 변화를 초래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8세기 중엽 이후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에는 화엄학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들이 다수 소속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경덕왕대(742~765)의 법해(法海)와 원성왕대(785~798)의 지해(智海)를 비롯해서 표원(表員)·연기(緣起) 등이 황룡사에 소속되어 있었음이 확인되며, 그밖에 범여(梵如)·견등(見登)·명효(明皛) 등도 이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법해는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조에 의하면, 경덕왕 13년(754) 여름 왕의 초청으로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이때 동해의 물을 기울이는 법력을 과시하는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 설화에 대해 일연은 법해의 법력을 기리는 찬을 붙이면서 사사무애의 도리를 상징하는 설화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같은 조에서는 법해의 ‘화엄경’ 강의에 앞서 전년 여름 가뭄이 심하여 유가종(법상종)의 태현(太賢)을 내전에 불러들여 ‘금광명경’을 강의하여 비를 빌게 하였는데, 우물(뒤에 金光井으로 명명)의 물이 솟아올라 높이가 7장이나 되는 법력을 보여 주었다는 설화를 함께 수록하고, 화엄종의 법해의 법력이 더 뛰어났음을 강조하였다. 법해와 태현 2인의 법력 대결 설화는 신라중대 불교학의 양대 산맥인 화엄학과 유식학이 경쟁하고 있는 가운데 화엄학의 우위성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원성왕대(785~798)의 지해(智海)는 황룡사의 승려였는데, 왕의 초청을 받아 대내(궁궐)에서 ‘화엄경’을 50일간 강의했다. 그런데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서 지해의 강의 사실을 서술하고, 이어 금광정에 얽힌 설화를 들고 있음을 보아 경덕왕대 ‘화엄경’을 강의한 법해와 같은 계열의 화엄학승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성왕 3년(787)에 범여(梵如)는 혜영(惠英)과 함께 소년서성(少年書省)이라는 승관에 임명되었는데,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로 ‘화엄경요결’ 6권(혹 3권)이 있었음을 보아 화엄학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원성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엄학승으로 표원·견등·명효 등도 화엄학 관련 저술을 남겨주었음을 보아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일군의 화엄학승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고승전’ 원효전에서 원효를 황룡사의 승려로 표기한 것도 황룡사를 근거로 활약한 이들 화엄학승들과 무관치 않았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그들은 독립된 학파나 종파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상의 법손들의 종파 활동과는 확실히 대조된다, 그런데 이들의 저술 가운데는 원효의 저술과 함께 법장의 저술도 인용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94호 / 2023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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