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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대감사 회주 설우 스님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알고 부처의 삶 사는 것이 선입니다

욕망·집착에 바탕한 생각 버려야 어리석음에서 깨어날 수 있어
참선은 자기 마음 밝히려는 의지로 원 세우고 마음 돌아보는 것
‘범소유상 개시허망’ 알고 체득하면 대원경지의 지혜 열리게 돼

설우 스님은 “어리석음이 업을 만들고 그 업으로 인해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라며 어리석은 꿈에서 빨리 깨어나도록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설우 스님은 “어리석음이 업을 만들고 그 업으로 인해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라며 어리석은 꿈에서 빨리 깨어나도록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오늘 불자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법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가장 많이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통해 참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오직 조사관을 투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사관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사관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 자성 혹은 본성이라고 하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조사 관문을 투과하는 데는 근심 가득한 중생심이 있으면 세간에 걸려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해탈할 때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는 “일체중생은 모두 여래와 같은 성품을 갖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성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알고, 믿고, 또 그걸 찾아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봐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성불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 법문을 통해 스스로 괴로움을 일으키는 마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참선(參禪)이라고 할 때 ‘참(參)’은 “무엇에 참여해서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찾는 것이냐? 그것은 과거에 쓰던 것이었지만 어리석고 미혹해서 방치해 버렸던, 오랜 세월이 지나 부처님 법을 통해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찾게 된 그 물건입니다.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이곳저곳으로 찾아 나서는 것을 참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찾다 보면 어느 날 그 물건이 눈앞에 탁 드러나게 됩니다. ‘아~ 여기 있었구나’라고 탄성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 순간 마음의 근심이 사라지고, 스스로를 옭아맸던 애욕과 고정관념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것은 뿌리도 없고, 실체가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찾으면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그것을 열반의 묘심을 터득했다, 해탈했다, 견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견성한 그 순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선(禪)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알고,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찾아 그대로 생활 속에서 부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인 것입니다. 

당나라 때 육조혜능 스님은 “좌선이라고 할 때 좌는 모든 인연 경계, 그 경계에서 마음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 것이며, 자기의 본성을 잘 돌이켜서 조금의 동요가 없고 산란함이 없는 것을 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참선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안과 밖에서 허덕거림이 없고, 텅 빈 자성을 바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혜능 스님은 ‘금강경’의 대의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을 종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종으로 삼는다’는 것은 으뜸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무념은 모든 생각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바세계에 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업보수생(業報受生)이고, 또 하나는 원력수생(願力受生)입니다. 우리는 미혹하고 어리석어서 다겁생을 윤회하면서 인연 따라 업에 따라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업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업보수생(業報受生)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업에 의해 왔다 갔다 하면서 두레박처럼 올랐다 내렸다 생사를 계속합니다. 어리석음이 업을 만들고, 그 업으로 인해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어리석은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 업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경계가 보이면 바로 그 순간 생각을 일으킵니다. 욕망과 집착 같은 가짜 주인공의 고정관념에 바탕을 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정견이 바로 서야 합니다. 
반대로 선지식이나 지혜가 밝은 분들은 업에 의해 이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원력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원력수생(願力受生)이라고 합니다. 업보수생과 원력수생은 무엇이 다를까요. 쉽게 비유를 하면 병들어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은 업보수생이고, 의사가 환자를 고치려고 출근하는 것은 원력수생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했습니다. 견성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해 다겁생을 통해 익힌 그 모든 업으로 인한 생각들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선의 요지입니다. 본래 자성은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그리려고 해도 그릴 수 없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참선의 방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입차문래 막존지혜(入此門來 莫存智慧)’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닦으려고, 자성을 보려고 참선하는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참선의 실천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화두가 될 수 있고, 염불이 될 수 있고, 참회 기도, 다라니 기도, 부처님 경전을 읽는 간경도 될 수 있습니다. 참선이라는 것이 꼭 앉아 있는 것으로 국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은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강한 의지 속에서 원을 세워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걸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도 하지요. 즉 돌이켜보는 모든 수행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참선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참선을 너무 협소하게 국한 시켜서는 안 됩니다.

육조혜능 스님은 또 ‘상에서 상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에서는 이를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이라고 했어요. 모든 상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본성을 지킬 수가 있고 자기 본성의 고요함, 자기 본성의 부동함을 알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금강경’ 사구게에서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 했어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그 인연 조건에 의해 잠깐 생겼다, 머물렀다, 퇴색돼 변해가고 사라집니다. 모두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생주이멸입니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혹하고 어리석어서 이 허망한 것들을 자꾸 붙들려고 애를 쓰고, 허망한 것에 목을 매고, 자기 마음을 거기에 다 묶어버립니다. 그러니 괴로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면 부부나 친지, 지인, 도반들의 관계가 달라져요. 허망한 것에 불과한 껍데기에 미혹되지 않고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즐거워집니다. 

이렇듯 상에 끄달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그 순간 자기의 본성, 자기 실상의 자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금강경’을 수차례 봅니다. 그러나 몇 번 독송했다는 그것에만 집착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간경은 그 뜻을 잘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 속에 참선이 다 들어있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임을 잘 알고 체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대원경지(大圓鏡智, 번뇌에 오염된 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얻은 지혜)의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대원경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맑은 거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은 어떤 현상이 비추더라도 그 현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현상이 지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남김없이 텅 비웁니다. 

여러분도 거울을 자주 보셔야 합니다. 거울만 봐도 참선을 잘 하는 것이고, 배울 점도 많습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다 수용하면서도 그 경계가 지나면 다 비워버립니다. 대단히 중요한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 스님이 강조한 세 번째는 무주위본(無住爲本)입니다. 이는 무주심을 말하는 것으로 무주심은 머무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잠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갑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말로 하거나, 몸으로, 생각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그냥 거기서 보되 보는 것에 집착하고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모두 참선법입니다. 이 참선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정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견을 갖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법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선지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훌륭한 법당에서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는 전생부터 이어진 선연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번 생에 부처님 법을 만나 지혜의 품에서 함께 정진해서 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불하세요.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청도 대감사 회주 설우 스님이 8월20일 부산 홍법사 백중 5재 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694호 / 2023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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