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2. 분명한 알아차림명상

기자명 일중 스님

행주좌와를 모두 알아차리라

일상수행이자 움직임 명상법
대소변 볼 때에도 꿰뚫어봐야
보고 마시는 행위 모두가 대상
바쁜 사람들에게 적합한 수행

몸을 관찰하는 신념처 위빠사나의 세 번째 명상법은 ‘분명한 알아차림(sampajāna)’ 이다. 무엇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것일까? 몸의 모든 움직임과 활동, 동작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래서 이 명상법은 ‘일상선(日常禪), 일상수행’이라고 하고, 움직임명상, 동작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분명한 알아차림’의 빨리어는 ‘삼빠자나(sampajāna)’이다. 삼빠자나는 ‘분명하게, 철저하게 바르게’라는 뜻의 접두사 ‘삼(sam)’과 ‘꿰뚫어 앎’이라는 ‘빠자나(pajāna)’가 결합한 명사이다. 그래서 삼빠자나는 ‘분명하게 꿰뚫어 앎, 분명한 알아차림, 바른 앎’이라고 번역한다. 그럼 ‘대념처경’에서는 이 명상법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비구는 (앞으로) 걸어갈 때도 (뒤로)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되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팔다리를)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경전에서는 대략 열아홉 가지를 언급했는데, 몇 가지로 분류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걸을 때, 팔다리를 굽히고 펼 때, 옷을 입거나 가사를 지닐 때,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때, 행주좌와 등 몸의 큰 동작과 움직임들을 다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볼 때조차 알아차려야 하는가? 그렇다. 예외는 없다. 미얀마의 때인구 사야도는 두 번째 성자의 단계를 얻은 뒤, 어느 날 밤 3시에 변비로 고통받으며 변을 보시던 중에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도 지혜가 발현되어 수행결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운 발견이다. 

둘째,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 때 지혜롭게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탐진치로 반응하면서 부정적인 업을 만들기 쉽다. 보려는 ‘의도’가 있음과 현재 이 순간 보고 있음, 대상이 보임 등을 계속 알아차린다.

셋째, 음식을 먹을 때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먹기명상이나 차명상의 경전적 근거와 출처가 되어주는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와서 어금니로 씹고, 혀로 맛보고 목으로 넘기는 모든 과정이 다 관찰 대상이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마음의 반응과 음식을 향한 강한 충동의 힘도 알아차릴 좋은 대상이다. 

넷째, 말할 때나 침묵할 때는 어떻게 알아차릴까?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알아차리고, 현재 이 순간 말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침묵할 때에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대상이 없어서 알아차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음, 말하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음 자체도 알아차릴 대상이다. 명상을 하고 있을 때나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지 않는 시간, 특별하게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물 때, 그런 시간에도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승님들은 말씀하신다.   

이런 일상선을 중요시하는 전통은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이다. 행선과 좌선이 주요 수행법이지만, 행선과 좌선 이외의 시간에 알아차림도 중요하기에 일상선도 강조한다. 또한 틱낫한스님도 설거지명상, 정원가꾸기 명상, 걷기명상 등 일상 수행을 강조하셨다.

바빠서 명상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분명한 알아차림명상’을 알려주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별도로 명상의 시간을 내어 다리 틀고 앉지 않아도, 언제든지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상은 열려있는 문이다. 그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티켓이 필요하다.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없이는 명상의 문, 지혜의 문이 아무리 크고 넓어도 결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satiupekkha@hanmail.net

[1694호 / 2023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