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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조용한 날들 - 한강

기자명 동명 스님

사물에 의미 부여하는 순간 왜곡

병을 앓던 중 발견한 작은 돌
아픔없는 무생물 돌이 부러워
돌일 뿐 그 자체로 의미 없어
의미부여는 내 생각임 깨달아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출발은 시였다. ‘조용한 날들’은 시인이 좀 아팠을 때 쓴 시이다. 아프다보니 밖에 덜 나가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아서 조용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아프다가”라는 첫 연이 탁 걸린다. ‘아프다’라는 형용사에 동사에 붙는 어미 ‘-다가’가 붙은 것이 좀 어색하다. ‘-다가’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 따위가 중단되거나 진행되는 중에 다른 동작이나 상태로 바뀜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이다. 시인은 ‘아프다’를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보지 않고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로 본 것 같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병을] 앓다가”가 된다.

시인은 한 며칠 앓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세월의 힘으로 점점 둥글어지고 있는 돌이었다. 시인은 생각한다,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픔은 생명이 있어서 생기는 것, 생명이 있으니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괴로움은 생명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요, 생명의 근원을 거슬러오르면 무명(無明)이요 어리석음이 된다.

나도 한때 무생물로 태어날 수 없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한 적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아라한(Arahan)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시인은 돌멩이를 오래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돌멩이는 마주 바라봐주지 않는다. 여기서 시인은 돌멩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돌멩이에 의미를 부여했음을 깨닫는다. 그때 햇살이 돌멩이의 네 언저리를 에워싸고 아름다운 조명을 비추어주었지만, 시인은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라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김춘수의 ‘꽃’을 생각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관계를 형성했다는 뜻이고, 관계를 맺으니 특별한 의미가 생겼다는 뜻이다. 한 세대 선배인 시인이 관계와 의미를 중시한 반면, 후배 시인은 마음이 간 돌멩이가 있었지만 줍지도 않았고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유독 김춘수의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가 대변해주었기 때문이다. 의미 부여를 좋아하다 보니 우리는 실제 사물을 우리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왜곡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다고 한강 시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줍고 싶은 돌멩이가 있었으나 줍지 않고 손을 뻗지 않았을 뿐이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694호 / 2023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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