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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는 나를 없애는 공부가 아니다 

기자명 혜민 스님

17. 어떻게 해야 무아를 깨달을까

애초 ‘나’를 상정해 없애려면
무아의 깨달음과는 요원한 일
‘나’라는 것을 분별치 않으면
분리된 ‘나’ 없었음을 알게 돼

처음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스님이 되려면 하심(下心)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평소에 쓰는 말이 아니었기에 그 당시 선배 스님께 그 뜻을 여쭈어 보니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라고 했다. 즉,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신을 높이거나 떠벌리는 교만한 언행이 아니고, 반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더불어 하심은 부처님 근본 가르침인 자기 아상(我相)을 부수어 무아(無我)를 깨닫는 길로 가기 때문에 모든 수행자들에게 기본이 된다고도 하셨다. 

그때 이런 설명을 듣게 되자, 나는 ‘우리가 하심을 하면 할수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진리에 가까워지는가 보다'라고 이해를 했다. 그래서 내가 꾸준하게 하심하면 언젠가는 그 노력이 모이고 모여 큰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후 승려가 되어 수행을 한다고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는 기간 동안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나 도반들을 종종 만나게 되었다. 흔히 그들은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에고를 죽여야 한다”라거나, “나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거나, “나를 온전히 포기하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결국 ‘나를 없애는 공부가 구도자가 가야하는 길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음이 열려 공부가 익어가면 갈수록 이런 류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이런 가르침은 애초부터 ‘나'라는 것을 먼저 상정해 놓고 나를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내가 나를 낮추어도, 먼저 내가 있고, 그 나가 나를 또 낮추려고 하기에 영원히 무아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내 에고를 죽여야 한다거나,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도 역시 먼저 나라는 것이 있고, 나의 일부인 에고를 죽이려고 하거나 나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게 되면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져서 아무리 나중에 어찌해봐도 무아의 깨달음과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생각으로 ‘나'라는 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세상과 분리된 내가 애초부터 없었구나하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일이다. 왜냐면 나라는 것도 생각을 해야 내가 있지, 생각이 없으면 나도 없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원래 따로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하는 진실을 그냥 아는 것뿐이지, 그것을 내 노력으로 추구해서 만들어가는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서면 나를 자꾸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어떤지 체크하고 나의 지금 상태를 문제 삼는 경우가 없게 된다. 마치 꿈속에서 꿈이라는 사실을 깨치려고 하면 문득 이게 꿈이구나 하고 그냥 바로 아는 일만 있지, 꿈 안의 내가 이런 저런 노력을 한다거나, 노력이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면서 질책한다고 꿈 안에서 깨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력과 질책하는 내용이 꿈이 되어 더 그 꿈만 지속될 뿐이다.

‘법화경’의 ‘화성유품’에서 보면 대통지승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첫 번째 법륜을 굴리면서 12연기법을 설하신다. 무명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생기는지 그 이치를 설명해 주시고 계시는데,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할 부분이 무명(無明) 다음이 행(行)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 모든 고뇌의 시작이 바로 멈추지 못하고 움직이려는 마음,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나아가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멈추어서 찬찬히 보면 원래부터 무아구나 하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한다. 이런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를 저항하면서 다른 더 좋은 깨달음의 상태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깨닫고 싶다면 지금 무언가를 내가 더 해서 깨달아야지 하는 그 마음을 쉬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넘어선 진정한 하심의 본래 의미이다. 더불어 모든 추구와 노력이 쉬었을 때 무명이 행으로 반연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생로병사가 원래부터 따로 없었구나 하는 시원하고도 안심되는 진실에도 눈뜨게 된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695호 / 2023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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