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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니까야와 업보윤리 - 중

인간행위는 우주적 질서 참여하는 하나의 방식

니까야에서 고통스런 비파카는 우주 근본질서 방해했기 때문
우주는 다른 의식적인 존재들과 상호관계 통해 지어지고 유지
다른 사람에 대한 해악은 결국 나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

그릇된 견해는 우주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양식이며 세계와 나 모두에게 해로운 것으로 개념화 할 수 있다. [법보신문]
그릇된 견해는 우주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양식이며 세계와 나 모두에게 해로운 것으로 개념화 할 수 있다. [법보신문]

니까야에 따르면 ‘쿠살라(선한;kusala)’ 행위는 ‘미래의 즐거운 경험과 행운의 환생/즐거운 경험 또는 행운의 환생’을 통해 지출되기 전까지 착실하게 저축되는 예금통장, 즉 이른바 ‘공덕’이다. 이에 반해 ‘아쿠살라(악한;akusala)’ 행위는 고스란히 저축되었다가 나중에 ‘고통스러운 경험과 불행한 환생/고통스러운 경험 또는 불행한 환생’으로 지출되는 쓸모없는 예금, 즉 ‘악덕’에 해당한다. 다만 니까야에서는 이런 예금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축적되고, 또 그것들은 어떻게 행위자와 결합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지출되는가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놓았다.

소크라테스가 본래 ‘신성한 것’ 대(對) ‘신의 사랑을 받는 것’ 사이의 우선성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는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은 그가 ‘이끌어지고 있기(being led)’ 때문에 ‘이끌어지는 상태(a state of being led)’에 있는가, 아니면 그가 ‘이끌어지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끌어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에우뒤프론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을 돕는다. 에우뒤프론은 마지못해 ‘이끌어지고 있는’은 ‘이끌어지는 상태’에 앞선다는 것에 수긍하지만, 이런 상황의 두 가지 구별이 곧바로 딜레마를 해결 해주지는 못한다. 에우뒤프론이 약간의 재치가 있었더라면, 이것은 사실 ‘같은’ 것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논법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니까야의 저자들이 어떤 행동은 ‘아쿠살라’이고, 그것은 다시 고통스러운 ‘비파카’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같은’ 것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행동이 ‘쿠살라’라고 말하는 것이나 그것은 즐거운 ‘비파카’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같은 뜻이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비행(duccarita)’이 즐거운 ‘비파카’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선행(sucarita)’이 고통스러운 ‘비파카’를 낳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브훗다투카 숫타(Bhudhātuka Sutta)’에서 많이 보인다. 이런 ‘불가능성’은 필연적인 인과적 ‘사슬’보다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고리’나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어떤 ‘결합’에 대한 확신을 거듭 환기시킨다. 

이처럼 니까야에서는 행위와 ‘비파카’가 맺고 있는 존재 양식의 근본적인 구조를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의상 그것에 일치하면 ‘쿠살라’이고, 반드시 그 행위자에게 이로움이 있으며, 그것과의 일치가 부족하면 당연히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것으로 해석된다. 피터 하비가 ‘그른’ 행위는 사물의 진정한 본성과 “같은 음조가 아니며”, 따라서 “자연적으로 즐겁지 않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썼을 때 이와 같은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예컨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는 체포와 사회적 비난, 친구의 상실 등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비파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훔치는 일이 사회적 가치나 어떤 이성적 명령의 불이행 혹은 그 자체로서 살아있는 어떤 존재들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곧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경전으로부터 비행이 즐거운 ‘비파카’를 품거나 선행이 고통스러운 ‘비파카’를 갖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주적 불가능성의 목록에 이런 것들을 포함하는 것은 인간 행위자가 처음부터 우주적 질서와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인간의 행위란 그와 같은 질서에 참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 짓고 있는 이 행위가 앞으로 우리의 미래 존재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놀라울 정도로 불교적인 ‘브리하다라니야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의 한 구절과도 정확하게 맥락이 맞닿는다.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변할 것인가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중략) 행위가 선하다면, 그는 선한 어떤 존재로 바뀔 것이다. 행위가 악하다면, 그는 악한 어떤 존재로 바뀔 것이다. (중략) 사람은 욕망에 따라 결심하고, 자신의 결심에 따라 행동하며, 나아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 

이 경전은 계속하여 욕망과 집착은 반복되는 윤회의 추동자이며, 모든 욕망을 제거한 자는 저 ‘브라만’에 도달한 다음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친다. 니까야에서는 행위-‘비파카’ 간의 관계를 어떤 사람의 존재가 언제나 이미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다고 파악한다. 여러 곳에서 우리는 동물들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베다의 희생제의가 우리를 천상에 이르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옥에 떨어지도록 한다는 주장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우주는 다른 의식적 존재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 지어지고 또 유지되는데, 우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만큼이나 나도 세상을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기서 보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은 그 안에서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삼아 내가 존재하게 되는 바로 그 본질적인 관계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훼손하는 것이므로 ‘이미’ 나 자신에게도 해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어느 정도는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죽음이자 그와 같은 행위는 존재의 다층적 구조 속에서 그대로 ‘살아’있다가 나의 현실적인 죽음에 뒤따르는 후속의 삶에서 지옥 안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비구들이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와 같은 명제들에서 구체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릇된 견해’는 우주질서와 일치하지 않은 행동 양식이자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 ‘자신’에게 모두 해로운 것으로 개념화될 수 있을 것 같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695호 / 2023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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