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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이지 않는 몸

보이지 않는 몸 출현은 자연계 모습이 변하는 것

투명인간은 동서양 모두 관심…용수보살 출가계기도 은신술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꿈은 우리 내면의 열망에서 비롯
최근 투명 쥐 만들었듯 사람들은 몸 변형에 적극 개입할 듯

먼 훗날 인간들은 색깔과 모양이 지워지는 등 다양한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먼 훗날 인간들은 색깔과 모양이 지워지는 등 다양한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나는 오래전에 ‘몸의 밀의(密意)’라고 하는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유식(唯識)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이 교리가 오직 순수한 식(識)만 있고 몸통은 사라진 존재들을 강조한 것이 아님을 부각하려 했었다. 우리의 ‘식’에 나타난 형상 중에 가장 생생하게 실감하는 것은 자기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해가면서 내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사람들의 오랜 꿈속에는 ‘보이지 않는 몸’에 대한 염원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 ‘초인’에 대한 글과 마찬가지로 이번 글도 최근에 본 어떤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내게 또 다른 호기심과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그 기사의 제목은 이러하다. “투명 쥐를 만든 과학자들, 다음 목표는 투명 인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옛 선현들의 냉정한 언어에 의지하여 이처럼 급변하는 세상을 이해해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웰스의 과학소설 ‘투명인간’과 같은 책이 120여년이 지나서도 계속 회자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책의 원제는 ‘보이지 않는 사람(invisible man)’이다. 사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삶이 결코 즐거운 것은 아니다. 눈꺼풀이 빛을 차단하지 못하기에 불면에 시달리고, 몸이 보이지 않기에 타인과의 교류도 단절되며, 결국 범죄에 연루되어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한편 옛 불교 문헌에도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약이나 주술이 언급된다. 가령 예신약(翳身藥)이나 은형법(隱形法)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은신술은 보살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범부가 그 비법을 습득하면 대개는 파멸로 이어진다. 불교 전설에 따르면, 제2의 부처라고 불리는 용수(龍樹) 보살도 철없던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 은신술을 익힌 후 궁정에 몰래 숨어들어 궁녀를 희롱하다가 결국 발각되어 큰 고초를 치른다. 이를 계기로 그는 욕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에 관해 거의 비슷한 악몽을 꾸면서도 우리는 어째서 계속 그 꿈을 놓지 않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 꿈이 우리 몸에 대한 숨겨진 열망 혹은 오래전 기억을 암암리에 드러내기 때문인 것 같다.

우선 우리 몸에 관한 교리부터 환기해보려 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도들은 현생의 몸은 각자 전생에 쌓은 업력의 총체적 과보[總報]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미륵의 후예들은 그 업력을 종자라고 불렀고, 아뢰야식에 잠복해 있는 자기만의 특수한 종자로부터 자기만의 몸이 생겨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중생의 아뢰야식은 육체의 형상과 색채를 이용하여 시시각각 자기의 운명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복이 한창일 때 그 식(識)은 흠결 없는 활기찬 육체를 환한 태양 아래 내놓을 테지만, 이번 생의 복과 명이 다하면 으스스한 시해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다.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전생의 과보로 주어진 인간의 몸은 불가피한 운명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앞으로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그 몸의 일부 혹은 전체를 변형시키면서 그 운명에 개입할 것 같다. 언젠가 저 투명 쥐를 만든 과학자들도 누구나 쉽게 투명 인간으로 변하게 하는 묘약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미륵의 후예들이라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활보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출현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의 형상이 흐트러지고 지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몸의 형상이 지워진 것에 대해 기세간의 형상이 지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우리의 몸에는 자기와 타인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가시적 측면이 있고, 오직 자기 내면에서만 알려지는 비가시적 측면이 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의 몸이 ‘감각기능을 가진 몸[有根身]’이기 때문이다. 몸의 정미한 감각기능들은 그것의 실질적 작용을 직접 경험하는 자기의 내면에서만 알려질 뿐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그 감각기능을 지탱해주는 물리적인 눈·귀·코·혀 및 그 밖의 신체 부위는 자기와 타인에게 공통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아뢰야식도 자타의 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다. 나의 아뢰야식은 감각기능을 가진 내 몸을 항상 전체적으로 알아차리면서 살아있는 실체로 감지하지만, 반면에 타인의 몸에 대해서는 마치 외부의 바위나 집과 같은 객체처럼 인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아뢰야식은 그 자신의 몸을 살아있는 실체로 감지하지만, 나의 몸에 대해서는 마치 외부의 객체처럼 인식한다.(‘성유식론’ 제2권)

그런데 만약 누군가 약이나 주술로 자기 몸을 보이지 않게 했다면, 본래부터 남에게 보이지 않는 감각기능은 그대로 남겨 두고, 남에게 보이는 육체의 형상을 지운 것이다. 유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 지워지는 것은 타인의 몸이라는 기세간의 상이다. 우리 몸의 가시적 측면은 상대방의 ‘식’ 안에서는 타인의 몸으로 나타나고, 타인의 몸은 외적 기세간의 일부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미륵의 후예들은 “타인의 몸은 기세간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서로 간에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기세간의 형상들이 흐트러지고 지워진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번쇄한 이야기로 독자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것은, 거기서 우리가 함께 상상해볼 만한 소재를 이끌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색깔과 모양은 지워졌지만 온전한 감각기능을 그대로 지닌 몸을 얻게 된다면, 그 투명 인간들은 다시 체취와 소리와 촉감까지 모두 지워버린 몸을 꿈꿀 수도 있다. 이처럼 오직 감각기능만 있는 무형의 존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풍경은 다소 삭막할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색깔과 모양 등이 더욱 다채로워진 육체들이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장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모습을 상상한다. 가령 저 천상의 책에 따르면, 괴겁 시에 한 유정이 자연적으로 색계의 선정을 획득하면 다른 유정들도 그를 따라 배우다가 모두 죽어서 색계의 극광정천(極淨光天)에 태어난다.(‘유가사지론’ 제2권) 저 극광정천은 바로 광음천이다. 나의 네 번째 에세이를 기억한다면, 성겁 시에 겁초의 인간이 바로 그곳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알 것이다. 만약 인간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고 인간의 몸도 그 길을 따르고 있다면, 미래인의 몸은 겁초의 인간과 닮아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언젠가 발광체처럼 빛나는 매끈한 몸에 온전한 감각기능을 장착하고 장애 없이 하늘을 날아다닐지도 모른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96호 / 2023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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