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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기자명 진우 스님

부처님 공양한 공덕 아무리 크더라도 무상보리에 비할 바는 못돼

금강경 수지하고 독송할 근기가 있다면 말세에도 성불 기회 생겨
분별 없음은 착함과 상통…착하면 욕심 없고 결국 깨달음도 쉬워
깨달음은 지식과 별개 문제로 기도‧참선‧보시의 실천만이 해결책

착함이 중도심이고 그 착함이 공덕으로 쌓이면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착함이 중도심이고 그 착함이 공덕으로 쌓이면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약부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 불급일 천만억분 내지 산수비유 소불능급(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후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그 공덕이야 말로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수의 비유도 능히 못 미칠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불 이전에 천만억 나유타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승사(承事)한 공덕이 아무리 크다하더라도, 어떤 이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깨친 공덕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심이다. 그만큼 이 경의 불가사의하고 무변광대한 공덕은,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고로, 한량없이 모두를 부처님으로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말세라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깨달음으로 대승의 근기와 최상승의 법신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공양하고 승사(承事)하는 공덕은 아무리 큰 공덕이라 하더라도 사상(事相)에 불과한지라, 단지 복보(福報)에 그치는 것이므로, 무상보리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경은 실상법신(實相法身)에 이르는 것으로서 일체의 상을 여의었으므로 일체상(一切相)을 여의었다 함은 곧 모두가 제불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한다고 하심이다. 또한 과거 세존께서 승사공양하신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부처님이 아무리 많다 해도, 모두 이 경에서 비롯한 것이며, 저 많은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상보제법(無上菩提法) 또한 아무리 깊고 묘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이 경에서 나온 까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불가설(不可說) 제불(諸佛)이 모두 계시며, 삼세의 불가설 무상보리법이 모두 이 경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말세에 이 경을 능히 수지 독송할 신심과 근기만 있다면 말세의 중생에게도 성불할 수 있는 기회와 은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고의 평화와 평안은 중도심(中道心)이다. 중도심은 인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좋고 싫은 분별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착하다고 표현한다. 착하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말에 즈음한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은 이득과 손해를 명확히 분별하는 것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득이 크면 크게 기쁘기는 할 것이나, 기쁜 만큼 고통과 슬픔이라는 과보 역시 크게 나타나게 될 것이니, 결코 이득이 이득이 아닌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대부분은 큰 욕심 없이 일에만 열중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무얼 자세히 몰라서도 약지 못하다.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크게 나타내지 않고 포기하며 때로는 본의 아니게 양보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언듯 보기에도 착한 분들로 보인다.

이렇게 작은 욕심으로 성실히 살면서 빠르게 포기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살다보니 크게 속상한 마음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늘 편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도시의 일부 약삭빠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적어도 큰 데미지 받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보하고 포기하며 착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손해일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더욱 착하게 산다는 의미는 중도심(中道心)에 가까운 마음으로써, 이를 권선(勸善), 즉 착함을 권하는 마음이라 하고 이는 더없이 크나큰 공덕이 되므로, 착함의 최후는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혹유인문 심즉광란 호의불신(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問 心卽狂亂 狐疑不信)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모두 말하게 된다면, 혹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음이 미혹하고 산란하여 여우같이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다 다 못하여 수보리를 불러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신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냐하면, 이 경전만은 대승근기가 아니면 도저히 그 이치를 받아 지닐 수가 없고, 그 말을 독송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일반적인 사량을 하는 하열한 범부가 이 경전을 대할 때에는 이치에 도저히 통달치 못할 것이니, 도리어 코웃음을 치고 비방하거나 의혹을 일으켜 이성을 잃고 마음이 산란하여 미칠 일이다. 그러하니 과연 이 경의 뜻을 받아 지니고 말로 옮겨서 내 것을 만들고 다시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야 말로 소승(小乘)이나 범부에게는 도저히 마땅한 일이 아니고, 그네들에게 생각조차 할 바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만약 이 경전에 대하여 아직 모르거나 의심이 간다면 먼저 신심을 고양해야 할 것이다. 신심을 어떻게 증장시킬 것인가? 인과의 뜻을 완벽하게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과란 분별심에서 비롯되고 분별심은 좋고 싫은 고락을 선택하는 것, 고락은 다시 반복하여 인과를 낳게 되니, 이 고리를 끊게 되면 ‘금강경’의 뜻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천문학적인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가운데 통계적으로 반 이상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지만, 주위의 돈 많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과연 돈이 많아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는 별로 보지 못했다. 돈이 많은 만큼 또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원인부터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과(因果)의 업(業)으로 살아간다. 즉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모두 해당되는 업(業)이다. 마음, 감정, 기분이란, 크게 대별하여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고락사(苦樂捨)의 감정, 즉 삼수작용(三受作用)을 말한다.

때문에 주위 환경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삶의 모습은, 자신의 고락(苦樂) 업(業)에 의해 인연 맺어지게 된다. 즉 돈이 되었든, 직업이 되었든, 명예와 권력이 되었든, 이 모든 삶의 여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첫째, 자신의 고락업(苦樂業)에 의해 인연이 지어진다. 둘째, 연기(緣起)에 의해 완벽히 인연 맺어진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과 여건이 만들어지든, 이와는 무관하게 좋은 만큼 싫고 나쁜 인과의 과보가 똑 같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돈이 많든, 벼슬이 높든, 거지가 되었든, 이 모든 환경과 여건과는 상관없이 그 누가 되었든, 좋은 만큼 싫고 나쁜 것이 똑 같이 생기게 되고, 싫고 나쁜 만큼 좋은 것 역시 똑 같이 생기게 되는 것, 만고불변이요 질량불변의 법칙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를 인과의 업이라 한다.

따라서 결국 자신이 지니고 있는 좋고 싫은 고락의 감정, 즉 인과 업을 멸하지 않는 한, 육도윤회의 고업(苦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고통과 괴로움은 숙명과도 같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좋은 것에만 집착한다면 고락 업에 의한 괴로움은 없어질 수가 없을 것이니, 하루 빨리 자신의 고락 분별 업을 줄여 나가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수보리 당지 시경의 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須菩提 當知 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의 뜻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그 과보도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느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인가? 어떠한 말 어떤 비유를 다 들지라도 그 뜻과 그 공덕에는 가당치 않기 때문에 그냥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과보가 생각할 수 없다함은 어찌된 말씀인가? 이 경이야 말로 한번만 외우면 선세의 죄업이 일념에 몽땅 사라지면서 곧 바로 부처님이 되는 까닭이요, 또 이 경의 뜻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이 경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불가사의한 뜻이 이 경전의 뜻인 까닭이다. 이 경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하열한 근기를 위하여 종으로 횡으로 말씀하시던 이른바 제3단 법문이 끝나게 된 것이다. 처음 경이 시작될 때 “이러히 내가 들었다” 한 “이러” 에서는 최상승 근기로 아녹다라삼먁삼보리심에 들게 하신 것이고, 그 다음 응당 “이러히 머물러 이러히 항복 받으라”고 하신 “이러” 에서는 대승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게 하신 것이다.

또 그 다음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 하시고 9류 중생을 멸도하되 “4상이 없이 멸도 하여야 보살이니라” 하신 이 구절의 “이러” 에서는 중근기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게 하심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이 경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하근기의 가지가지 의심처를 가지가지로 쫓아 버리게 하시려 이리 몰고 저리 몰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 들게 하여 마치신 것이니, 이에 모든 법을 듣던 대중들은 상‧중‧하 세 가지 근기를 막론하고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진정으로 좋은 것일까? 당연히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대중들로부터 부러움과 존경,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옛날 가난한 선비들은 돈 많은 진사보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없이 살지언정, 지식이 풍부하고 교양과 도덕 윤리가 갖추어 졌다면, 벼슬아치나 부자들을 얕잡아 보면서 자신의 자태에 대한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많이 안다는 것과 올바른 행동거지, 그리고 마음이 평안한 것과는 엄연히 구별을 해야 한다. 많이 아는 것이 곧 행복하다거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도덕과 윤리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그이들이 도덕군자로 살아 갈 것이라는 판단은 대단히 섣부르다 하겠다. 대신 기억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즈음과는 달리 소납이 어렸을 때의 절 집, 특히 제방의 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들 사이에는 가방 끈, 즉 세속에서의 명문학교를 나온 선객들은 알음알이가 많아서 오히려 견성하기가 더디다는 통설이 대체적이었다. 그만큼 출세간에서의 알음알이란,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로 치부할 정도로 터부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안다는 것은 분별망상과 비례하는 고로, 많이 알수록 고민도 크다는 짐작이 먼저 앞선다. 사량 분별을 멈추고 화두를 잡아서 산란심 없이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물론 많이 안다고 하여 무조건 방해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이 알면 깨달음도 빠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서일 뿐, 많이 알아도 좋고 싫은 분별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한다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이 알지 못한다하여 자신을 탓하거나, 남의 박학다식에 대해 부러워한다거나, 그래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박사라 해도 좋고 싫은 고락의 업은 피할 수 없다. 무식한 사람의 인과 업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귀 지식 건강 장수 권력 명예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락업(苦樂業)의 분별을 줄여 나가기 위한 마음공부 즉,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이야 말로, 인과를 멸하고 업장을 소멸하여 영원한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97호 / 2023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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