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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35주년 창간특집] 1. 1988년 법보신문은 왜 세상에 태어났나.

  • 창간특집
  • 입력 2023.09.18 16:33
  • 수정 2023.09.18 18:34
  • 호수 1697
  • 댓글 1

‘파사현정’으로 거듭나는 불교 바라던 시대 요구에 부응

1980년대 민주화 격동 속 응축된 불교계 혁신 에너지 분출
시대 간파한 월산대종사 혜안에 불국사 전폭 지원으로 창간
변화·자성 목소리 범불교적으로 담아내며 ‘종단개혁’ 가교

1988년 5월 법보신문 창간을 앞두고 월산대종사가 선원빈 초대편집국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1988년 5월 법보신문 창간을 앞두고 월산대종사가 선원빈 초대편집국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1988년 창간한 법보신문이 올해로 창간 35주년을 맞이했다. 불국사 월산대종사의 원력으로 새로운 불교,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사명감을 안고 일성을 울린 법보신문은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불자들의 성원과 관심 속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침을 겪기도 하고 독립언론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 앞에서 35살을 맞이하는 법보신문은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1980년대 한국은 처절한 봄의 계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싹이 움틀 것으로 기대했지만 또 다른 군사정권과 독재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전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화 세력들이 거리로 나섰고 그들의 열망이 거센 파도처럼 한국 사회를 휘감았다. 불교계도 그 흐름에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함께했다. 1987년 벌어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은 6월 항쟁, 그리고 6·29선언에 의한 민주화 요구 수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박종철 열사의 49재를 봉행한 부산 사리암은 민주인사와 대학생들의 사실상의 집결지였고 스님들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격동의 시대였고 피로 맺은 결실이었다.

1980년대를 거치며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불교의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져 갔다. 이는 해방 이후 누적돼 온 불교 차별과 탄압에 대한 저항이자 파사현정의 요구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적산불하(敵産拂下), 군종장교제도, 기독탄신일 공휴일 제정, 종교방송 독점 및 장악, 형목·경목 제도 등 기독교 특혜 정책을 펴며 사실상 불교를 옥죄었다. 특히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법난을 겪으며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불교계에서는 80년대를 거치며 ‘대전환’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었다. 

이는 불교 내부의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도약을 모색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공권력에 의해 지속된 불교 탄압과 폄훼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계에 따르며 1960년 128만9000명(‘서울연감 통계자료’)에 그쳤던 불자인구는 1985년 국가 차원의 첫 종교인구 통계에서는 805만명에 이르며 한국의 주류 종교로 성장해 있었다. 이 과정에는 일제강점기에도 명성을 드날렸던 경허, 용성, 봉려관, 학명, 만공, 석전, 한암, 만해, 효봉 스님 등으로부터 동산, 춘성, 운허, 금오, 일엽, 전강, 청담, 구산, 성철, 서옹, 월산, 탄허, 청화, 광덕, 숭산, 일타, 무진장, 법정 스님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고승들과 선지식들의 덕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재가불자들의 활발한 활동도 수레의 두 바퀴처럼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견인했다. 불후의 명저인 ‘조선불교통사’를 집필한 석학 이능화를 비롯해 양건식, 이광수, 장경호, 전진한, 김기추, 이종익, 김영한, 이한상, 황산덕, 서돈각, 김미희, 이기영, 김종서, 장상문, 김부전, 서경수, 박성배, 고익진 등 숱한 재가불자들의 지극한 신심과 전문성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불교의 발전을 견인해 나가는 동력이 되었다.

불교 내부에서 성장한 민주주의 열망도 변화의 진앙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민중불교운동은 1980년대 초반 본격화되면서 ‘한국불교는 사회와 민중을 향해야 한다’는 불교의 사회참여 의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스님들은 1981년 7월 전국청년승려육화대회, 1982년 6월 전국학인승가연맹 발족, 1983년 전국불교청년불교도연합대회 등을 통해 스님과 재가불자가 협력해 불교계 개혁을 이끌어 나갈 역량 확보를 적극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1985년 5월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 그리고 1986년 6월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창립 등의 결실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새로운 불교를 요구하는 구심점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마침내 1986년 9월 7일 해인사에서 200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한 승려대회로 이어졌고, 이 대회에서는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과 불교계의 자율성을 박탈한 ‘불교재산관리법’의 철폐를 요구했다. 정부의 폭압과 부당한 행정에 대한 전례 없는 단합된 목소리였다.

이처럼 내외에 응축된 불교계의 에너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넓은 시야와 전문성을 갖고 불교의 커진 목소리를 반영할 새로운 언론이 필요했다. 여기에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새로운 언론 창간 요구는 빠르게 급부상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어낸 혜안의 선지식은 성림당 월산 대종사(1913~1997)였다. 월산 스님의 원력아래 경주 불국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언론 출연의 산파역할을 담당했다. 신문 창간을 위한 실무는 정휴 스님이, 실질적인 재정지원은 종상 스님이 맡았다. 월산 스님은 정부 관계자를 직접 만나 새로운 불교언론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당시 문화공보부 종무관으로 재직했던 이용부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88년 2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월산 스님과 만났던 기록을 확인하며 “월산 스님은 범불교지의 필요성과 불교가 새로워지려면 새로운 신문이 필요함을 역설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8년 3월26일 문화공보부 등록(다-504)을 마치고 5월14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본사에서 ‘법보신문’ 창간기념식이 열렸다. 창간 제호는 한국 서예계 권위자인 초정 권창륜 선생이 썼고 창간호는 5월16일자로 발행됐다. 창간호 1면 사령에는 김종원 부사장을 비롯해 사장 직무대행 종상, 주간 겸 주필 정휴, 상임논설위원 오현(무산) 스님과 선원빈 편집국장 등 경영진과 기자 등 16명 구성원들의 이름이 올랐다.
 

법보신문 창간을 축하하며 서옹 스님이 쓴 축하휘호 ‘정법제생'. 이 휘호는 현재까지도 법보신문 편집국에 걸려있다. 
법보신문 창간을 축하하며 서옹 스님이 쓴 축하휘호 ‘정법제생'. 이 휘호는 현재까지도 법보신문 편집국에 걸려있다. 

법보신문 발간 취지와 배경은 창간호 사설 ‘천수천안의 거보’에 잘 드러난다.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첫 문장으로 시대인식을 드러낸 사설에서 발행인 월산 스님과 신문 창간을 주도한 당사자들은 사회적 과제, 언론관, 편집 방향을 명확히 천명했다. 

‘우리는 전 불교도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용기 있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한 것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불교는 정치적으로 소외당하고 불이익을 받아왔다. 이와 반면 국가와 사회 안정을 위해 호국안민의 정신을 발휘해 왔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법보신문은 불교도의 권익과 중흥에 노력할 것이며 민족의 고통에 뜨겁게 동참하여 그 고통을 구제하고 중생을 요익케 하는 서원을 지켜나가면서 부처님 사상으로 참다운 인간정신을 깨우치는 진리의 공기로서 그 역할을 다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그러나 불교 언론은 단순한 사회의 공기로서가 아니라 부처님 법음을 전달하는 포교적 역할도 병행해야 한다. 포교의 현대화는 이 시대 불교인의 바람이다. 그리고 포교의 대중화가 이룩될 때 불교인의 의지도 새롭게 계도될 것이다.’

이처럼 뚜렷한 목표 의식과 함께 ‘우리 조사들이 지켰던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기개와 신념을 바탕으로 언론대도(言論大道)의 본령을 지킬 것’임을 공언하며 ‘적당히 눈치나 보고 역사와 사회의 비리를 묵인하는 아세(阿世)의 지성을 배척할 것이며 진실을 위해서는 할(喝)과 방(棒)으로 이 시대 비양심적 행위를 깨우치는 데 앞장설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창간과 동시에 ‘진실을 위한 할과 방’을 자청하며 ‘개혁의 견인차가 되겠다’는 법보신문의 당찬 선언은 초대발행인 월산대종사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월산대종사는 창간사를 통해 ‘잠들지 않고 쉬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굽힘이 없고 쓰러짐이 없고 부서짐이 없는 목탁을 만들었다’며 ‘썩은 치아로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는 없듯이 불교계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아 나가는 일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훈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존경진리(尊敬眞理), 굴복아만(屈伏我慢), 공명정대(公明正大)’라는 사훈은 “진리만을 받들고 공경하며 업신여기는 아만(我慢)을 굴복시켜, 공명정대(公明正大)가 항상 하는 불국토를 구현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러한 월산대종사의 신념을 계승하고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법보신문은 창간 직후부터 진보적 스님들과 지식인들을 필진으로 기용하고 기관지에는 실리지 못했던 불교계 내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적극적으로 지면에 담아냈다. 법보신문이 창간과 동시에 불교개혁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며 종단개혁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창간 첫해 선보인 ‘한국불교 무엇을 극복할 것인가’와 1990년 ‘한국불교 오늘의 문제’ 등의 연재는 교계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고 자성과 성찰을 통해 대안을 형성하고자 하는 법보신문의 뚜렷한 언론관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법보신문 창간을 이끌며 초대 주간과 주필을 맡았던 정휴 스님은 “법보신문은 창간 직후부터 기사와 필진에 있어 기관지와는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 그곳에서 실릴 수 없는 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실렸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법보신문에서 (종단 실권자들을 향해) 불편한 소리와 가차 없는 비판을 하다 보니 조실스님에게도 이런저런 얘기가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에 대해 언급하신 일이 없고 철저히 독립권을 지켜주셨다”고 전한 바 있다. 

비판이 거세 되고 찬양으로 일방하던 불교계 여러 기관지들과 차별하면서 불교개혁과 자성의 목소리를 담아낸 법보신문의 탄생은 ‘파사현정’으로 거듭나길 열망했던 불교계와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697호 / 2023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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