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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1)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7)

의상 법손 활동시기, 화엄사 중심 연기 계통 화엄승 호남서 활약

신화로만 알려졌던 연기 스님, 화엄경 사경 발견되며 행적 확인
승적은 황룡사에 뒀으나 실제로는 화엄사 주석이 학계의 정설
의천, 연기 저술 기록하고 영찬도 남겨…원효‧법장 학풍과 유사  

의상 법손들이 부석사 중심의 영남에서 교세 확산에 나설 무렵 연기 계통 화엄승들이 화엄사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활동했다.[법보신문DB] 
의상 법손들이 부석사 중심의 영남에서 교세 확산에 나설 무렵 연기 계통 화엄승들이 화엄사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활동했다.[법보신문DB] 

신라 불교사의 전성기인 중대(654~780)에는 다양한 불교학파들이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불교인 화엄종의 학승들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후반기인 750년을 전후하여 황룡사의 승적을 가졌거나, 황룡사를 무대로 활동하던 화엄학승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음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이러한 학승들 가운데 특히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의상 계통의 법손들과 별개로, 화엄사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화엄종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학승으로 연기(緣起)가 있었다. 종래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이 있었고, 화엄사의 창건주로 전해지는 연기 또한 매우 전설적인 인물로 이해되어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시기가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스님이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호남도구례현지리산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華嚴寺事蹟)’(1636)을 비롯한 사적기류(事蹟記類)에는 진흥왕 5년 갑자(544)에 인도 승려인 연기가 화엄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적인 사실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진흥왕 5년 연기의 창건에 이어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하고, 그 뒤 의상이 장육전과 ‘화엄경석경’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시기에 신라 승려가 백제 지역에서 사찰을 건축하거나 증축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또한 화엄사에 현존하는 중요한 석조물들이 모두 8세기 후반 이후에 조성된 양식이라는 미술사학 분야의 해석 등의 이유를 들어서 사적기류의 기록에 대한 의문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사적기류의 이와 같은 의문은 1979년 80권본 ‘화엄경’의 사경(寫經)이 학계에 소개됨으로써 일거에 풀리게 되었고, 화엄사의 연기는 8세기 중엽에 생존하였던 역사적인 인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사경은 모두 8축으로 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2축만이 잔본(殘本)으로 수습되었다. 2축 가운데 1축은 ‘화엄경’ 권1~10, 다른 한 축은 권41~50의 부분으로 추정되는데, 그 앞머리에는 각각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졌고, 각 축의 끝인 권10과 50권의 말미에는 거의 같은 내용의 조성기(造成記)가 기록되어 있어 불교학·역사학·국어학·불교미술사학 등 여러 분야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권50 말미의 조성기는 14행 520여자의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었는데, 조성연대, 발원자와 서원의 취지, 사경과정과 의례, 사경소임자(所任者)의 이름·출신지·관등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화엄경’의 사경 시기는 천보(天寶) 13년(甲午) 8월1일~14년(乙未) 2월14일, 곧 경덕왕 13년(754)~14년(755)이고, 발원자는 황룡사의 연기법사(緣起法師)로 명기되어 있어 연기는 경덕왕 때 황룡사에 소속된 승려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조성기의 뒷부분에 열거된 소임자들의 출신지가 왕경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어서 사경의 장소에 대해서 다소의 혼란이 없지 않았다. 즉 지작인(紙作人) 1인, 경필사(經筆師) 11인은 금구·광주·남원·고부 등 모두 화엄사 인근 지역의 출신이고, 경심장(經心匠) 1인,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 4인, 경제필사(經題筆師) 1인은 모두 왕경(경주) 거주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의 제작과 사경의 담당자는 모두 화엄사 부근 지역의 인물이었던 반면에 경심의 제작, 변상도와 경전 제목의 필사 등 좀 더 중요한 부분의 담당자는 왕경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왕경과 지방의 문화적 수준 차이를 드러내 줌과 함께 실제의 사경 장소는 화엄사였으며, 따라서 발원자인 연기도 승적은 황룡사에 두고 있었으나, 실제 주석한 곳은 화엄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또한 사경 조성의 서원(誓願)은 연기가 만든 것인데, 서원의 내용이 첫째가 은혜를 주신 아버지를 위한 것이며, 그 둘째가 법계의 일체중생을 성불케 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왕실이나 중앙 귀족을 위한 불사(佛事)에서의 발원 내용과는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줌으로써 지방 출신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8세기 중엽 이후에는 화엄종이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호남 출신들이 주체가 된 불교로 확대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의상 계통의 법손들이 주로 북악(北岳)인 태백산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그 교세를 확대하고 있었을 때, 같은 시기 연기 계통의 화엄승들은 남악(南岳)인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지역에서 전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기의 행적은 754~755년에 ‘화엄경’의 사경을 조성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고려시기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장소(章疏)를 간행하기에 앞서 선종 8년(1091) 봄 불서를 수집하기 위하여 남쪽 지방을 여행하는 가운데 지리산의 화엄사를 찾아가서 2수의 시를 남겼다. 의천은 화엄사에 머물며 남긴 시에서,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가 맑고,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없어라. 온종일 서성이며, 지나간 일 생각하니, 저물녘 효대(孝帶)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네”라고 하여 의천이 4사자석탑과 4사자석등에 얽힌 연기의 효성 설화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의천은 화엄사에 봉안된 연기조사의 진영(眞影)에 예배하고 다음과 같은 영찬(影讚)을 남겨주고 있었다. “웅위한 경과 논에 모두 통달하여, 일생 동안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3천 의학(義學)이 법등을 나눠 전한 이후, 원교(圓敎)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그리고 의천은 이 영찬에 자주(自註)를 붙여서 연기가 평소에 ‘대승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연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고, 또한 본전(本傳:‘해동승전’의 연기전(緣起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훈(覺訓)이 1215년에 찬술한 ‘해동고승전’에 앞선 고승전이 존재했음을 확인케 한다.)을 인용하여 연기의 문도가 3천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의천의 찬시를 통하여 연기가 ‘대승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그 문도가 3천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였던 사실을 고려 중기까지는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연기의 문하에서 3천명의 학승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부석사에서 의상의 문도가 3천명이었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과장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의상의 3세 제자인 부석적손(浮石嫡孫) 신림(神琳)이 북악 태백산 부석사를 중심 무대로 하여 화엄교학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던 8세기 중엽, 연기는 남악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고 별도의 화엄종풍을 크게 떨치고 있었던 상황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의천은 화엄사 방문 전 이미 연기의 저술들을 구하여 선종 7년(1090)에 편찬된 교장 간행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하고 있었다. 즉 ‘화엄경요결(華嚴經要決)’ 12권(혹 6권), ‘화엄경진류환원락도(華嚴經眞流還源樂圖)’ 1권, ‘화엄경개종결의(華嚴經開宗決疑)’ 30권, ‘대승기신론주망(大乘起信論珠網)’ 3권(혹 4권), ‘대승기신론사번취요(大乘起信論捨繁取要)’ 1권 등 5종인데, 모두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에 대한 저술들로 연기가 이 두 경론을 강의하였다고 한 의천의 찬시 자주의 언급과도 부합된다. 아쉽게도 연기의 저술들은 모두 일실되어 오늘날 내용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그 저술들의 제목으로 볼 때 ‘화엄경’과 함께 ‘대승기신론’이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기와 그 문도들의 이러한 화엄학풍은 ‘화엄경’과 ‘일승법계도’의 강의와 주석에만 오로지 집중했던 의상 직계 법손들의 학풍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의 화엄학풍은 원효와 법장의 저술을 주로 연구하던 태현·표원·견등 등 일군 학자들의 그것과 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앞 호에서 의상계와 구분되는 태현·표원·견등 등의 교학을, 원효와 법장의 교학을 융합시킨 형태로 파악한 바 있었는데, 화엄사의 연기가 이들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화엄경’과 함께 ‘대승기신론’의 연구를 통하여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한 원효와 법장의 학풍과 유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8세기 후반 의상의 문도들이 왕경의 중앙 불교계로 진출하여 불국사가 불교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9세기 이후에는 해인사·숭복사 등이 연이어 왕실의 원찰로 창건되어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주류 종단으로 등장하게 됨으로써 10세기 초에는 전국의 화엄 사찰을 통칭하여 10대 제자에 상응하는 ‘전교10찰’(삼국유사), 또는 ‘화엄10산’(법장화상전)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으며, 의상 계통이 아닌 연기의 화엄사도 10찰 가운데 포함되어 거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기의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9세기 중엽의 정행(正行), 10세기 전반의 정현(定玄)과 관혜(觀惠), 활동 시기가 불명인 영관(靈觀) 등이 이름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화엄사 이외에 지리산 일대의 여러 사찰들도 사적기류의 자료에는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찰들은 연기가 직접 창건한 것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 연기의 화엄학풍이 넓게 유포되고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한편 10세기 전반 후삼국의 분열에 상응하여 화엄종 교단은 남악파(南岳派)와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고려 문종 29년(1075) 혁련정(赫連挺)이 찬술한 ‘균여전(均如傳)’에서는 남악파와 북악파의 분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대사(균여)는 북악의 법통을 이은 분이다. 옛날 신라 말엽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사종(華嚴司宗)이 있었는데, 한 분은 관혜공(觀惠公)으로 후백제의 괴수 견훤의 복전(福田)이었고, 다른 분은 희랑공(希朗公)으로 우리 태조대왕의 복전이었다. 두 분은 신심을 내어 향화(香火)의 원(願) 맺기를 청하였는데, 원이 이미 달랐음에 마음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문도에 미쳐서는 점점 물과 불 사이가 되어 불법의 취향이 제각기 시고 짠 맛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法門)을 남악이라 했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이라 했다. 대사는 매양 남북의 종취가 모순되어 가려지지 않음을 한탄하고, 많은 갈래를 막아 한 길로 돌리고자 하였다.” 

이에 의하면 화엄종 교단이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남악파는 후백제의 견훤, 북악파는 고려의 왕건과 각기 연결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 대립의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아서 발단은 해인사의 관혜와 희랑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폭발한 것이지만, 그 연원은 북악(태백산)의 부석사를 근거로 한 의상 법손들의 교단과 남악(지리산)의 화엄사를 중심으로 한 연기 법손들의 교단 사이의 화엄교학상의 차이에서 발원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남악파와 북악파 사이의 대립 상황과 균여에 의한 화엄종의 통합과정은 ‘고려 광종대 불교개혁과 균여의 화엄학’ 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698호 / 2023년 9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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