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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마지막 경지에서는 내가 없다)

기자명 진우 스님

말은 상대적인 것으로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분별이 생겨난다

허깨비 같은 현상 벗어나는 데는 반드시 연습과 훈련이 필요
불편하고 싫은 감정 생길 때 인과 귀신 나타났구나 돌이켜야
불교는 자업자득의 가르침, 기도와 참선, 보시의 수행은 필수 

일이 잘못돼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이 많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의 업을 빨리 되돌아봐야 한다. [법보신문DB] 
일이 잘못돼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이 많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의 업을 빨리 되돌아봐야 한다. [법보신문DB]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기를,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오니 마땅히 어떻게 머물도록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 상(上) 중(中) 하근기(下根器)에 따라서 자상하신 설법과 정령하신 자비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침의 땅으로 인도하셨으니, 깨달은 마음이라는 이 한 물건이 오롯이 홀로 드러남이다. 이때에 수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묻지 못할 말을 묻게 되는 바, 왜냐하면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땅에 도달하였을 진댄, 머무를 보리(菩提)가 어떤 것이며, 항복 받을 보리심(菩提心)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보리는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한 물건도 없는 것에, 머무를 것이 어디 있으며 항복 받을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가히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묻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 물건도 없다고 하는데도, “한 물건도 없다”는 것에 또 머무를 것인가? 그렇다면 “한 물건도 없다는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머물게 되는 마음을 또 항복 받을 것인가? 수보리의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실 것인가? 참으로 난해한 질문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스님! 정말 정말 마음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을까요? 못마땅한 것도 없고, 싫지도 않고, 아쉬운 것도 없고, 시비고락(是非苦樂)도 없는 무조건 편안하고 평안하게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질문은, ‘무엇을 잘되게 해 주십시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병이 없게 해주세요, 장수하게 해주세요, 늙지 않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 등등의 욕심과는 차원이 달라서 좋다.

부처 또는 부처님이란 가장 완벽한 상태를 가리킨다. 완벽하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못마땅한 것이 단1도 없다는 뜻이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좋고 싫은 분별(分別) 인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고 싫은 것이 없다. 이름하여 무조건 평안하고 편안하다.

말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일단 말로 표현되는 것은 분별이 생긴다. 즉 평안이라고 하면 이미 불평이라는 것이 생기고, 편안이라고 하면 불편이라는 것이 덩달아 생긴다. 이렇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상대적인 차원이 아닌 평안과 편안을 말함이니, 이를 이름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서, 이름하여 평안과 편안 즉, 부처가 되려면 분별 자체를 벗어나야 하고, 감정이 머무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당연히 분별이 생기고, 좋은 것에 집착하게 되므로, 그렇다면 당연히 인과가 생기게 되어 결국 싫고 나쁜 고통과 괴로움, 불편과 불안, 불평이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같은 분별과 집착에서 오는 고업(苦業)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부단한 연습과 훈련, 즉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하다. 못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이 생길 때, 그 즉시 나의 인과 귀신이 나타났구나 하고 좋지 않은 감정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마음에 드는, 일이 잘되는 것을 이미 마음에 품고 있으니, 곧 바로 인과가 생기게 되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일이 계획대로 잘되지 않는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어떤 일이 잘못되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지극히 착각된 생각이다. 어떤 일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좋은 것을 찾게 되는 탐진치(貪嗔痴)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원인이므로, 절대적으로 마음 밖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끄달려서는 계속적으로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나는 현상이 벌어질 때는, 얼른 마음 감정을 추스려야 한다. 이럴 때는 일어난 일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싫고 나쁜 감정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구나’ 하고 자신의 업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 어떤 일을 만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싫고 나쁜 생각과 감정이 보글보글 드러날 때는, 밖의 일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내 감정이 문제로구나 하고 자신의 좋지 못한 업에 그 탓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숲을 보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크게 넓게 써야 하느니, 항상 마음 밖에서 나타나는 좋지 않은 현상에 대해 마음이 끄달려서는 안 된다.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인연 연기(緣起)에 의해 돌아갈 뿐이므로, 결국은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내 마음의 고락업(苦樂業)을 멸도(滅度)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좋은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는 분별심(分別心)을 하나하나 눌러 제거해야 하거늘, 그러려면 일단 눈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마음 감정이 머물러 집착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화를 돋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허깨비 같은 모든 현상에서 벗어나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결코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지건,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 싸우고 지지고 볶고 얼마든지 할지라도, 진짜로 화를 내거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이야 말로 인생 최고의 가치라 할 것이다. 

불고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당생여시심(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縟多羅三貘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 가운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이러히) 마음을 낼지니라.”

“이와 같이” 또는 “이러히”라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무엇을 ‘이와 같이’ ‘이러히’라고 하는 것인가? ‘이러히’ 또는 ‘이와 같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모습 즉 본자청정(本自淸淨)한 성품이 그대로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본자청정이란 본래 스스로 청정한 마음이다. 또한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땅히 ‘이러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지니라”고 하신 이 말씀에서 수보리가 묻는 말이나, 부처님께서 답하시는 것 등등의 것은 다 같이 흔적도 없는 것이다.

성품 자체가 본자청정(本自淸淨) 하므로 그 무엇도 붙을 수가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한 생각, 한마디 말도 꺼낼 수도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곧 본자청정이므로 이도 마찬가지이다. 본자청정이므로,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므로 이미 묻는 수보리나 답하는 부처님도 모두 비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로 경에 이르기를, 내가 응당 일체중생을 멸도하였고, 일체중생이 멸도를 마쳤는 고로, 한 중생도 멸도한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한 중생 또한 없으니 멸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멸도가 있다면 중생이 있는 것이니, 다시 한 중생을 더하고 남길 뿐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멸도(滅度)와 멸도견(滅度見)이 있는 마음이 생긴 탓이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있으면 다시 한 중생을 짓게 되는 것이요, 멸도를 보는 마음이 있더라도 또한 중생을 짓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사실은 깨달은 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데서 오는 현상인 것이다. 마음을 깨닫고 보면, 모두가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아니, 부처라는 분별도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인 까닭에, 한 점의 눈이 붉은 화로에 내려앉는 것만 같다 할 것이다. 이에 그 어떤 괴로움도, 아쉬움도, 근심 걱정도, 붙을 곳이 없는 까닭이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회를 대대적으로 하는 이유는 부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을 통하여 나 자신과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부처님이 되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왜 부처가 되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기분 나쁜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다. 즉 괴로움과 슬픔, 고통과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서 영원히 안온적정(安穩寂靜)하기 위해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즉 안 되는 것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잘 이해하고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진정으로 부처님 말씀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할 수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걱정 근심은 물론, 일체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불교는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종교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도, 신과 하나님도, 모두가 내 마음의 표상(表象)에 불과하다. 내 마음, 내 생각에 없는 것은 나타날 수가 없다. 보고 듣는 것은 나의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에서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것은 싫고 나쁜 인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영원히 좋은 것도, 영원히 나쁜 것도 없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딱 그만큼의 싫고 나쁜 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 또한 순전히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분별 인과를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고 목표이다. 이를 중도(中道) 또는 성불(成佛)이라고 한다. 지금 강의하고 있는 ‘금강경’은 이에 대한 실천 요강이다. 때문에 ‘금강경’만이라도 잘 수지(受持)독송(讀誦)한다면 부처를 이루는데 최고 최대의 효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99호 / 2023년 10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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