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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동림선원 주지 신공 스님

불교공부는 어리석지 않도록 자기 지혜를 닦는 과정입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괴로움‧욕심‧분별‧집착 일어나게 돼
부처님 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지혜는 생각과 말에 불과
기도‧수행으로 자기 부족함 보고 지혜로운 생각 지녀야

신공 스님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혜로운 생각을 갖고 실천해 나갈 것을 당부했다.
신공 스님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혜로운 생각을 갖고 실천해 나갈 것을 당부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새기겠습니다. “반야는 지혜를 말한다. 일체의 모든 시간에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롭게 실행하는 것을 곧 반야의 실천이라 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는 끊어지며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는 생기느니라.”

오늘은 음력 8월의 초하루 법회일입니다. 초하루에 ‘오늘 절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시듯이, 매일매일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겠다는 원력이 항상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종교가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인간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또 앞으로 100년, 200년, 1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인류에게 신의 사랑을 전파했다면, 불교는 우리에게 지혜를 갖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般若)’로 설명합니다. 이 ‘반야’는 무슨 뜻인가. 또 지혜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여러분이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의 관점에서 불교 공부가 무엇이냐고 스스로 물었을 때 결국 우리는 ‘마음을 닦는다.’ ‘마음을 다스린다.’라고 표현합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 불교 공부는 자기의 지혜를 닦아가는 과정입니다.

법문을 시작하면서 ‘육조단경’의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지혜라는 것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중생(衆生)’이라고 말합니다. 왜 중생입니까? 어리석으므로 중생입니다. 사실 어리석음으로 인해 모든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욕심도 일어나는 것이고,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분별도 일어나는 것이며,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집착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절에 다니며 항상 지혜를 닦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경을 독송하고 진언을 외우는 여러 수행의 방법들이 모두 지혜를 쌓아가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는 것에 다 포함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실천하는 것, 그 지혜로움의 실천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잘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무리 지능이 높고 수많은 지식을 배웠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조건 훌륭하다고 하진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혜로운 생각으로 얼마만큼 가득 차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또 생각만 지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께서 불교를 많이 배우고 머릿속으로 부처님 법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지혜는 생각과 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며 특히 그 지혜를 실천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인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많이 일으키고 살다가도 어리석음으로 인해 어느 한순간 생각이 미혹해져 버립니다. 생각이 바르게 가다가도 어떤 다른 생각이 그 바른 생각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욕심도 일어나고 시기심도 일어나고 분노도 일어나서 온갖 마음의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들어서입니다. 깊이 성찰하고 스스로 자기 내면을 닦아가는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는 것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배운 것 이외에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고 닦아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배우고 닦음을 잠시라도 늦추게 되면 그 사람은 생각이 거기에서 딱 멈춰 버립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하고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사회적으로 출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을 더 지혜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지식을 쌓는 것도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 지식을 잘 닦으면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잘 배워야만 그 법을 통해서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의 지혜는 끊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우리를 덮어버리기 때문에 그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서 지혜로운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반야가 생긴다.’ 이 말씀을 드립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중생이요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부처다.’ 이 말씀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항상 지혜로움 속에서 다가가야 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우면 세상 일체의 어떠한 괴로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의 장애가 없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마음의 장애가 많습니다. 마음의 장애를 심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부처님의 수행을 닦으면서 그 속에서 계속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하고 절을 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어리석은 한 생각을 올바른 지혜로 내가 바꾸어 가겠습니다.’ 이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은 바로 반야의 지혜를 나의 마음속에서 계속 끄집어내는 겁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의 제자 가운데 신회(神會)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신회 스님이 스승인 혜능 스님에게 묻습니다. “스님께서는 좌선하면서 보십니까, 아니면 보지 않습니까?” 이에 혜능 스님이 주장자로 신회 스님의 머리를 딱 때리고 “내가 때리니 아프냐 안 아프냐?” 묻습니다. 신회 스님은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합니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자 혜능 스님 또한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회 스님은 “스님 무엇으로 무엇을 가지고 ‘본다’라 하고 ‘보지 않는다’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다시 또 묻습니다. 이때 혜능 스님이 “항상 자기의 잘못을 보고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은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새겨보아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의 허물이 무엇인지 살피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 지혜로운지, 이것을 항상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혜능 스님은 “나는 참선을 하면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잘못된 것을 본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보십니까? 사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보기도 어렵지만,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여러분의 허물을 스스로 모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만 보입니다. 불자님들은 항상 스스로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잘하지도 못하면서 남편이 어떻고 자식들이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혜능 스님과 신회 스님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신회 스님의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몽둥이로 머리를 맞으면 당연히 아프다 해야 하는데,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혜능 스님이 묻습니다.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 스님은 말합니다. “제가 만약 아프지 않다면 머리가 흙이나 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프다고 하면 몽둥이로 머리를 맞았으니 때린 사람이 밉기도 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속인과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혜능 스님은 말합니다. “신회야, 네가 보는 것은 내가 안다.” 스승은 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설마 내가 너를 미혹하게 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스스로 보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저 자신도 때때로 제가 잘하는 것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 스스로는 너를 보지 못하면서 나에게 보느냐 보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느냐?”라는 혜능 스님의 제자를 꾸짖는 이야기를 새깁니다. 그만큼 이 말씀 속에는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늘 지혜로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됨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기 이전에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도 맞고 저렇게 해도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도량의 예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빼놓고 달리 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의 행동, 자기 자신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잘 살펴서 항상 지혜로운 생각, 지혜로운 마음으로 불자의 삶을 사셨으면 합니다. 

반야라는 불교 용어는 곧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말씀인지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15일 경남 김해 장유의 문화전법수행도량 동림선원에서 봉행된 ‘음력 8월 초하루 법회’에서 주지 신공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99호 / 2023년 10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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