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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2)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18)

의상 직계와 연기 계통 사상적 차이 균여와 의천의 갈등으로 이어져

후삼국 분열로 부석사 중심 북악파와 화엄사 중심 남악파 양분
균여, 광종의 교단 체제 정비에 부응해 파벌 통합 및 교학 정리
의천은 균여를 비판하며 연기 계통의 교학 재평가…갈등 이어져

가야산 해인사 전경. 후삼국 분열 후 첨예하게 대립한 남악파 관혜공과 북악파 희랑공은 모두 해인사에 소속된 스님이었다.  [법보신문DB]
가야산 해인사 전경. 후삼국 분열 후 첨예하게 대립한 남악파 관혜공과 북악파 희랑공은 모두 해인사에 소속된 스님이었다.  [법보신문DB]

문무왕 16년(676) 의상이 화엄종을 창립한 후 100여 년 지난 8세기 중엽 그의 법손들이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고, 중심인물이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불려진 신림이었다. 그런데 신림이 북악인 태백산 부석사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을 때 남악인 지리산 화엄사에서는 연기가 ‘화엄경’을 사경하는 등의 활약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화엄사에서는 ‘화엄경’ 석경판을 조성했는데, 오늘날까지 잔편이 전래되고 있다. 연기는 왕경의 황룡사 승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되는데, 황룡사에는 연기 이외에도 다수의 화엄학승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나아가 그들이 저술한 화엄학 내용이 ‘원효·법장 교학의 융합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의상 법손들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화엄학은 일본으로도 이어져 화엄종 주류와는 구분되어 별도의 화엄학 계보를 성립시켰음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9세기말 후삼국으로 분열되면서 부석사 계열과 화엄사 계열 사이의 사상적·지역적 차이가 북악파와 남악파 사이의 파벌싸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후삼국 분열 시기에 북악파와 남악파의 파벌싸움 상황에 대해서는 고려 광종대(950~975) 두 파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균여(均如,923~973)의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이하 균여전으로 칭함) 제4 입의정종분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대사는 북악의 법통을 이으신 분이다. 옛날 신라 말엽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사종(華嚴司宗)이 계셨는데, 한 분은 관혜공(觀惠公)으로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고, 한 분은 희랑공(希朗公)으로 우리 태조의 복전이었다. 두 분은 신심으로 향화의 인연을 맺기를 청하였는데, 맺은 인연이 이미 달라졌으니, 마음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 그 문도에 이르러서는 점점 물과 불 사이가 되어 불법의 취향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가 어려웠던 까닭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된 까닭이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관혜공의 문도를 남악(南岳)이라 부르고, 희랑공의 문도를 북악(北岳)이라고 불렀다. 대사는 매양 남악과 북악의 종지가 모순되어 승패 없이 다투기만 하는 것을 탄식하고 분파가 생기는 것을 막아 통일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한 수좌 인유(仁裕)와 함께 명산을 널리 유력하고, 커다란 사찰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큰 법고를 울리고 큰 법당을 세워 불문의 젊은 승려들이 모두 다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균여전’은 혁련정(赫連挺)이 균여의 법손으로 추정되는 창운(昶雲)의 요청을 받아서 문종 28년(1074) 4월 붓을 들어 다음 해 정월에 탈고한 글인데, 앞에 인용한 ‘입의정종분’의 서술 내용에는 약간의 설명이 요구된다. 우선 이 자료에서는 남악파의 영수 관혜공과 북악파의 영수 희랑공이 모두 해인사에 소속된 인물이었고, 그들과 연결된 정치세력이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으로 나뉘게 되면서 대립하였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서술에 의거하는 한 관혜와 희랑 모두 같은 해인사 소속 승려였기 때문에 같은 의상계의 법손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래 해인사는 애장왕 3년(802) 신림의 제자인 순응과 이정이 창립한 사찰로 그 법손들이 주석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 남악파와 북악파의 대립을 화엄사 교단과 부석사 교단의 파벌싸움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균여전’에서는 앞에 인용한 구절 다음에 양파 사이 갈등의 폐단을 없애기 어려운 이유로서 그 유래가 오래된 문제였음을 지적하고, 그 당시 사람들이 관혜공의 문도를 남악파, 희랑공의 문도를 북악파라 불렀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두 파벌 사이의 대립은 관혜공과 희랑공의 사이에서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파벌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후삼국의 분열에 따른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로서만 끝나지 않고 불법의 취향이 달라서 물과 불의 관계였다고 표현한 것은 두 파벌 사이의 사상적인 차이가 오래된 문제였음을 추정케 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후삼국의 분열에 상응하여 해인사에서의 관혜와 희랑 사이의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가 분열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 그들을 따르는 문도들이 두 파벌로 나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 파벌의 대립은 해인사 안에서 관혜 문도와 희랑 문도 사이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 분열과 지역적 차이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그 위에 의상-상원-신림의 계통과 연기의 계통 사이의 사상적인 차이가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하면서 급기야 화엄종단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북악파와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악파로 양분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악파의 남악은 화엄사가 소재한 남악 지리산, 북악파의 북악은 부석사가 소재한 북악 태백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한편 남악파와 북악파가 대립하고 있던 후삼국 시기 화엄종단에서는 다양한 학설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균여전’에서는 남악파와 북악파의 대립사실을 서술한 구절에 이어 화엄교학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또한 화엄교의 가운데 앞선 분들이 초해 놓은 30여 가지 의기(義記)가 있었는데, 그 명목은 이와 같다. 삼교소위동체(三敎所爲同體)·공유(空有)·진불진(盡不盡)·권실(權實)·화장설(華藏說)·성토해(成土海)·명난(明難)·탄불탄(歎不歎)·삼생섭체(三生攝體)·수직(授職)·육상(六相)·취실본실(就實本實)·단장미소(斷障微少)·도솔천자오종성불(兜率天子五種成佛)·해행불분상(解行佛分相)·유목회심(流目廻心)·육지(六地)·팔회(八會)·백육성(百六城)·정토(淨土)·보리수(菩提樹)·성기(性起)·오과(五果)·사수공양(四修供養)·주반장(主伴章) 등이 그것이다. 대사께서 (의기들의) 원류가 달라서 어긋나고 뒤섞인 것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고 글이 번잡한 것은 요점을 추려서 깎아내고, 그 뜻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자세히 궁구하여 드러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부처의 경(經)과 보살의 논(論)에 의거하여 교정을 하였으니, 한 시대의 성스러운 교학을 다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균여는 당시 문제가 된 교학의 주제들을 열거한 다음에 그 의기들이 착오가 많다고 생각하여 글이 번잡한 것은 줄이고 부족한 내용은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균여가 정리한 명목의 타당성이나 교정 내용의 의미는 앞으로 좀 더 검토할 문제이지만, 당시 화엄교학의 난립된 학설들을 종합 정리하려는 균여의 의도와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균여는 광종의 교단체제 정비정책에 부응하여 남악파·북악파로 양분된 파벌의 통합 노력과 함께 사상적으로 난립한 교학상의 문제를 정리하는 작업도 함께 추진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균여 이후에는 남악파·북악파의 이름이 역사상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광종의 교단개혁과 균여의 화엄종 통합의 노력으로 화엄종의 파벌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던 것 같다. 사상적인 노력으로서는 화엄종의 교학을 종합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균여전’의 제5 해석제장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대사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는 불법을 넓히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써 그 자신의 임무를 삼으셨기에 제가(諸家)의 문서 가운데 소상히 알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주석(註釋)을 지으셨다. 그리하여 ‘수현방궤기’ 10권, ‘공목장기’ 8권, ‘오십요문답기’ 4권, ‘탐현기석’ 28권, ‘교분기석’ 7권, ‘지귀장기’ 2권, ‘삼보장기’ 2권, ‘법계도기’ 2권, ‘십구장기’ 1권, ‘입법계품초기’ 1권이 있어 모두 세상에 퍼져있다.”

균여의 저서 10종은 모두 중국 화엄종의 지엄과 법장, 신라 의상의 저술들을 주석한 것인데, 당과 신라의 초기 화엄종의 교학을 종합 해석한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균여의 화엄학 관계 저술은 당시에 화엄학의 기본적인 텍스트로서 권위를 갖고 승과시험 답안의 표준이 되었다. ‘균여전’ 제4 입의정종분의 결론 부분에서 균여 저술의 권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국가가 왕륜에서 크게 승과를 개설하여 승려의 급제자를 선발하기 시작한 뒤로 우리 대사의 견해로써 정통을 삼고 나머지로 방계를 삼았으니, 무릇 재주가 있다고 하는 무리들이 어찌 이 길로 말미암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크게는 왕사와 국사의 지위를 차자하고, 작게는 대사와 대덕의 자리에 이르렀으니, 자기 한 몸 드러내고, 자신의 발자취를 드러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균여가 입적한 이후 100여 년이 지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출세하여 화엄종을 개혁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의천은 불서를 수집하기 위하여 국내뿐 아니라 중국·거란·일본 등과 국제적인 교류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선종 8년(1091) 봄 남쪽 지방에 내려가 불서의 수색 작업을 행하였다. 이때 남악의 화엄사에도 찾아갔는데, 연기의 진영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웅위한 ‘화엄경’과 ‘기신론’에 모두 통달하여, 평생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3천 의학이 법등을 나눠 받은 뒤로, 원교(圓敎)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균여가 북악파 중심으로 남악파를 통합하면서 연기를 도외시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의천은 화엄종 조사로서 연기의 업적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천은 자신의 저술 곳곳에서 당시 화엄종의 학승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신집원종문류’ 서문에서는, “근세에 우리 (화엄)종에서는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좇아 근거도 없이 분분하게 우겨대는 바람에 마침내 조사의 현지가 막혀서 통하지 않게 된 것이 열에 예닐곱이나 되니, 교관에 정통한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어찌 크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 참여한 학도 치수(緇秀)에게 내린 글에서는, “세상의 이른바 균여·범운·진파·영윤 등 여러 사람의 저서를 보면 글을 잘못 지어서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뜻도 통하지 않아서 조사의 도를 황무케 하고 있으니, 후생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라며 균여 등을 직접 거명하여 극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의천이 균여 저술을 비판한 이유를 이두의 문체 때문이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양자 사이에는 화엄교학의 내용과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균여가 의상과 지엄·법장 등의 초기 화엄학, 특히 의상의 화엄교학의 입장을 고집하였던 반면 의천은 징관의 후기 화엄학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원효의 종합적인 불교사상을 특히 중시하였고, 아울러 연기의 교학을 재평가하여 조사의 반열로 끌어올려 그 업적을 크게 추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천의 간행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10여 종의 균여 저술은 제외하는 대신 연기의 저술은 5종이나 수록했다. 결론적으로 신라시대 8세기 후반 의상 직계의 신림과 연기 사이의 사상적 차이, 그리고 10세기 전반 남악파와 북악파 사이의 파벌 대립은 고려시대 균여와 의천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00호 / 2023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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