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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주한 연변 지역 동포의 신행 장소 마주하자 ‘뭉클’

  • 기고
  • 입력 2023.10.25 14:57
  • 호수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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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3사(寺) 성지 순례 체험기

항일독립군 동포 지원한 근대 고승 수월 스님 흔적 마주하고
재건한 ‘화엄사’ ‘수월정사’와 중국식 ‘광우사’ ‘요양백탑’ 답사
성지순례 공덕으로 보기 어렵다던 ‘백두산 천지’도 맑고 화창 

순례단이 요양백탑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다. 
순례단이 요양백탑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다. 

금년 7월 어느 날, 내가 근무하고 있는 조계종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시행하는 백두산 3사(寺) 순례에 동참할 종무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순례 장소는 중국 료양, 심양, 도문,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옛 만주(요동) 지역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지역 범위를 보고 순례 일정이 모두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근 10년 이상 금강산 신계사조차 가보지 못한 현실이기에, 백두산과 두만강 사찰 순례에 기꺼이 동참하게 됐다. 이번 순례는 기존의 성지 순례와 다른  감동이 있었다. 벅차고 경이로웠던 순간들을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어 글을 쓴다. 

첫 일정은 자금성과 심양고궁(瀋陽故宮)이었다. 후금의 왕궁이었던 심양고궁은 베이징 고궁과 더불어 중국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2대 궁전이다. 고궁에 도착하자 ‘심양고궁이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 있었다. 중국 역사와 문화적 중요성을 대표하는 장소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단의 호기심과 답사 의지도 커져갔다. 심양고궁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의 아픈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1612∼1645)의 자취이다. 1636년, 후금은 청(淸)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중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 강화도는 함락됐고, 인조 아들 소현세자는 동생 봉림대군(효종), 삼학사 등 관원 180명과 함께 볼모가 돼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성징(盛京·현재의 심양)으로 압송됐다. 소현세자는 1637년 5월 선양고궁 인근에 건립된 심양관(중국 기록은 조선관)을 숙소로 삼아 8년간 머물면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을 지원하고 청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를 펼치는 등 선양고궁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다. 
 

심양고궁 하마비(下馬碑)를 살펴보는 순례단.
심양고궁 하마비(下馬碑)를 살펴보는 순례단.

그런 역사가 담긴 장소를 걸으니 가슴 한쪽이 ‘뜨끈’해지며 우리의 아픈 기억을 잠시나마 잊고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동시에 고궁 곳곳을 둘러보며 청나라가 고궁을 통해 체계적인 행정기구를 갖춰 운영했는데 정작 조선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이 무렵 소현세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자 복잡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순례 여정의 출발지로서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성지순례가 진행됐다. 이를 위해 순례단은 고속철도를 타고 800㎞가 넘는 만주벌판을 달렸다. 정말이지 끝없이 벌판과 옥수수밭이 이어졌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 내내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낯선 풍경은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일제 수탈을 피해 이런 대광야에 이주해온 우리 동포 생각도 났다.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일궈냈다는 사실이 또다른 감상으로 이어졌다. 

4시간 남짓 만주벌판을 끝없이 달리자 목적지인 연길(延吉, 옌지)에 도착했다. 연길은 지린성 동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심도시로 인구는 약 63만명이라고 한다. 한자를 한국어로 발음해 옌지가 아닌 연길이라고 부른다. 조선족 자치주답게 이곳은 안내와 간판, 심지어 언어까지 모든 것이 한글이어서 마치 우리나라에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내가 지금 중국에 있다’는 사실마저 무색하게 했다. 아직도 연길에 도착했을 때 충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다음 일정은 중국 길림성 도문시의 ‘화엄사’와 ‘수월정사’ 답사였다. 수월음관 스님(水月音觀, 1855~1928)은 1912년 두만강을 건너 일광산에 터를 잡고 수월정사를 지은 근대 조선불교 선지식이다. 경허 스님의 3대 제자이기도 하다. 이날 가이드로부터 스님의 출생과 관련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자식이 없어 노심초사하던 부친이 어느날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솔굴에 숨겨줬고, 노루를 찾으러 온 포수에게 엉뚱한 방향을 알려줘 노루를 구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로 수월 스님이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제법 듣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수월 스님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군과 이주해 온 동포를 위해 짚신과 주먹밥을 만들어 베풀었고, 그런 스님의 항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조선족 동포들이 화엄사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족 동포들은 스님을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
 

일광산 화엄사 앞에서.
일광산 화엄사 앞에서.

화엄사의 첫 관문은 제법 웅장했다. 산문에 들어서자 뒤편으로 남양시의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화엄사 전각은 더없이 친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포들이 사찰을 창건할 때 한국 전문가에게 단청을, 북한 만수대창작단 화공에게 후불탱화를 맡겼다고 한다. 대웅전 불상은 중국에서 조성됐다. 그러니 화엄사는 남한과 북한, 중국의 공동불사가 된 셈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우리나라에선 정치인들이 북과 무섭게 대적하고 있는데 정작 뜻밖의 장소에서 대통합이 이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지 오덕 스님의 안내로 화엄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할 수 있었다. 대웅전 부처님 아래에는 수월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화엄사를 둘러본 뒤 두만강변에 있는 수월정사로 향했다. 이곳은 수월 스님이 직접 주석했던 요사채를 법당으로 만든 곳이다. 스님이 독립군에게 조국 해방 운동을 격려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는 불사금이 부족해 유지 보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휑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을 기리는 마음까지 가벼이 여길 수 없겠다 싶어 더욱 진중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다. 

이후 일광산에 올랐다.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과 북한의 모습이 보였다. 멋진 풍광을 보고 있자니 순례단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가이드로부터 최근 논란이 됐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가 발의된 곳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자 감명이 더해졌다. ‘화엄사’와 ‘수월정사’는 일제강점기 연변 지역 동포의 신행 장소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넘어 종교적 의미까지 느낀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일정은 백두산이었다. 학수고대하던 날이었다. 백두산 천지 풍광을 볼 수 있는 날은 이런저런 이유로 1년에 약 100일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기상 악화로 백두산 자체를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오르더라도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때문에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백두산을 마주할 순간이 다가올수록 순례단의 걱정도 커져 갔다. 단원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천지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얘기했다.  

출발 버스에 오르자 안내원은 “한 신사 분이 천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수년에 걸쳐 백두산을 7번 방문했지만 모두 보지 못했고 곧 다시 올 것 같았던 그 신사분 모습은 더이상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음이 괜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백두산에 올라 천지 아래 쉼터에 도착하니 단원들 눈빛은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이번 순례로 나름의 덕을 쌓았다’는 자부심에서였다. 

그러다 선두에서 “천지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릴 지 모른다는 생각에 순례단 모두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마주한 천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애국가 첫소절이 절로 생각났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에 벅차오름 마저 느꼈다. 순례단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사진·영상·글로는 백두산 천지를 직접 본 감동을 대체할 수 없다. 꼭 직접 봐야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백두산 소천지에 조성된 백의관음상 앞에서 참배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올리고 나니 멀찍이 장백폭포가 보였다. 순례단은 기도, 명상 등 각자만의 방식으로 종교적 의미를 되새겼다. 
 

백두산 천지를 답사한 뒤.
백두산 천지를 답사한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마지막 날 아침이 됐다. 이날은 요양시 광우사와 백탑을 참배하는 일정이었다. 광우사는 중국식 사찰이었다. 사찰의 산문 역할을 하던 블루스톤 아치는 거대했고 대웅전 앞 청동향로도 웅장했다. 대웅보전과 전각 안에 모셔진 목조 금좌불상도 굉장히 컸다. 한국식 사찰과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광우사 근처 공원 안에는 요양 백탑이 있었다. 금나라 때 건립한 높이 71m의 8각13층 벽돌 탑이다. 역사가 800년 넘는 중국 전국 6대 고탑 중 하나라고 한다. 순례단 모두가 백탑  앞에서 합장한 채 탑돌이를 했다. 공원에서 휴식을 즐기던 중국인들이 우리 모습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큰소리로 예불을 드릴 순 없었지만 탑돌이를 하는 순간 만큼은 대한민국 불자로서 강한 자긍심을 느꼈다. 
 

요양 광우사 앞에서 기념촬영.

이번 일정을 통해 순례단은 부처님 지혜를 마주하고 스스로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잊을 수 없는 백두산 의 아름다움도 직접 경험했다. 한국불교 역사와 밀접한 중국 역사도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재 중국 관할에 있다고 하더라도 만주(요동) 지역 사찰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아울러 900년 이상 우리나라 불교를 형성해 온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순례의 경험은 남북의 협력와 동북아 평화, 중국 역사와 문화에서 한국 불교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특별한 여정이었다. 이 여정에서 얻은 경험들이 부처님 세상을 만드는 일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백두산 성지순례 길에 불자들 발길이 끊이질 않길 바라며.

심재명 조계종 총무원 행정관 

[1701호 / 2023년 10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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