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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생불(生佛)로 추앙받은 스님

기자명 민순의

탁월한 능력·종교적 카리스마로 대중 신망 얻어

처경 스님, 수려한 용모·신이한 수행에 ‘살아 있는 부처’ 불려
소현세자 유복자 의심받아 처형됐으나 무당 의해 신앙 대상
대중 추종 카리스마 형상화되며 민중 신앙 속 유사 기능 발휘

모악산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 조선 후기 종교를 초월하여 생불(生佛)과 미륵불에 대해 이루어진 신앙은 당대 혁세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1901년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문화재청]
모악산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 조선 후기 종교를 초월하여 생불(生佛)과 미륵불에 대해 이루어진 신앙은 당대 혁세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1901년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문화재청]

숙종 2년(1676) 처경(處瓊)이라 불리던 25세의 젊은 승려가 보름여 동안의 국문 끝에 처형당했다. 죄목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라 사칭하며 인심을 의혹시켰다는 것. ‘대명률’의 ‘조요서요언(造妖書妖言)’ 조항에 근거한 일이었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78책, ‘요승처경추안(妖僧處瓊推案)’ 병진년 11월15일.)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자였으므로, 인조의 차남인 효종의 손자였던 숙종에게 소현세자의 아들은 5촌 종숙에 해당된다. 단순한 신분의 사칭을 넘어 왕권이 위협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재위 2년차에 접어든 16세의 어린 임금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그런데 사태가 종료된 뒤에 남겨진 처경에 대한 평가는 보다 복합적인 것이었다. ‘실록’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용모는 자못 수려한 듯하나, 성질이 간교하고 사특하였다. 신해년(1671)에 그 스승을 버리고 기전(畿甸: 서울 인근의 경기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신승(神僧)이라 자칭하고…궤변으로 ‘곡식을 끊었다’ 하고는…불경을 가르친다 칭탁…또 작은 옥(玉)으로 만든 불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전하여 말하기를, ‘무릇 바라는 것을 빌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이 물결처럼 달려가 생불(生佛)이라 일컬었고, 여러 궁(宮)의 나인(內人)들이 공불(供佛)하기 위해 사찰에 왕래하는 자들도 존신(尊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숙종실록’ 5권, 2년 11월1일.)

본디 강원도 아전(衙前)의 아들로 태어난 처경은 양부모를 여의자 16세에 출가하여 ‘처경’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19세부터는 스승을 떠나 강원도와 경기‧서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당국이 사건을 접수하기 이전에 이미 준수한 외모와 벽곡(辟穀)의 수행, 경문(經文) 해석과 기도(祈禱) 의례에서 보인 능력 등을 바탕으로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며 종교적 명망을 얻고 있었다. 특히 그가 지닌 옥불(玉佛)은 치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원통암에 벙어리 한 명이 옥불을 얻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달려가 기도하였습니다.” ‘요승처경추안’ 병진년 11월4일.)

처경의 사례는 17세기 후반 출신 사찰이나 승단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종교적 카리스마에 의지하여 대중의 신망을 얻은 스님들이 존재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 경우 그 카리스마의 근원은 벽곡과 같은 신이한 수행 풍모, 사람들에게 용이하게 전달되는 불법의 강설, 무엇보다도 기도와 치유 등에서 보이는 탁월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적 지지를 토대로 할 때 그 종교적 카리스마는 혁세(革世)의 구심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처경의 사례는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처경과 같이 대중 친화적이며 혁세의 가능성을 지닌 종교적 카리스마를 (그들이 스님이었을 경우) ‘생불’ 즉 ‘살아있는 부처’라고 부르며 신뢰하였고, 반대로 공권력은 그들을 요승(妖僧)으로 폄칭하였다.

사실 처경이 혁세를 꿈꾸며 모반까지 적극적으로 도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편지를 조작하여 왕실 및 고위 관리들과 접촉을 시도한 것이었는데, 더 이상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의 사건은 공식적으로 역모가 아닌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그의 사칭 행위가 “앞모습은 생불 같고 뒷모습은 왕자와 같다”며 혹시 어릴 때 버려졌다는 소현세자의 유복자가 아니냐는 추종자의 질문에서 촉발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점이다.(‘요승처경추안’ 병진년 11월4일 ; ‘숙종실록’ 5권, 2년 11월1일.) 이는 세상에 대한 변화와 희망의 동인이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 자체라기보다 카리스마를 지지하는 대중에게 있는 것임을, 적어도 처경의 경우에는 그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처경을 제외하고도 13명의 인물이 신문을 받았고, 추국 과정에서 사망한 1명을 포함 총 9명이 최종적으로 죄를 언도받은 데에서, 이 사건이 집단 소요의 형태로 발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처경의 처형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로부터 11년 뒤 처경은 뜻밖의 일로 ‘되살아난다.’ 숙종 13년(1687) 황해도 해주의 한 무당이 신당에 처경을 배향하고 영험을 약조하며 대중들의 선망을 받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숙종실록’ 18권, 13년 4월30일 ; ‘승정원일기’ 322책, 숙종 13년 5월 5일.) 무속에서 정치적으로 박해 받은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10여년이나 지난 뒤에 무속의 지도자가 처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당시 생불로 추앙받던 스님들이 대중에게 지녔던 강력한 위상을 확인해 준다. 또한 대중이 추종하는 카리스마가 종교를 넘나들며 형상화되고, 특히나 이 시기 민중의 신앙 속에서 불교와 무속은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로 받아들여지며 유사한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무당에 의한 생불 신앙이 지속되었다. 숙종 17년(1691) 황해도 재령에서는 한양이 장차 망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생불을 찾기 위한 탐색[天機工夫]과 의례[山間祭天]가 진행된 일이 있었으며(‘숙종실록’ 23권, 17년 11월 25일), 영조 34년(1758)에는 황해도 금천(金川)·평산(平山)·신계(新溪) 등지에 네 명의 무당이 등장하여 스스로를 생불이라고 일컬으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영조실록’ 91권, 34년 5월 18일).

기록에 따르면 처경 사건 이후 무속에서의 생불 신앙은 주로 황해도 지역에서 성행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조선 후기 불교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불교라는 종교에 갇히지 않은 혁세의 분위기는 반도 전체에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불교적 메시아라고도 일컬어지는 미륵불 신앙이 그 내용이며, 스스로를 옥황상제이자 미륵부처라고 자처한 강일순(姜一淳)에 의해 1901년 창종된 증산교는 그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소개한 처경의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최종성, ‘무당에게 제사 받은 생불 –요승처경추안(妖僧處瓊推案)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40, 2012 ; 최종성, ‘생불과 무당 -무당의 생불신앙과 의례화-’, ‘종교연구’ 68, 2012 ; 최종성 역주, ‘역주 요승처경추안’, 지식과교양, 2013.)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703호 / 2023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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