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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림석굴 제25굴 ‘팔대보살만다라’

기자명 오동환

다른 모습 여덟 보살, 실상은 여래와 한 몸

“여래, 보살 몸으로 사자좌 이루셨다”는 ‘대일경’ 시각화
보살정신 구현을 일체행 기초로 삼고 있음 천명하는 대목
성당 시기 이후 다양한 보살이 신앙 대상 된 배경도 설명 

1)유림 제25굴 동벽 팔대보살만다라. 존상의 표현 수법이나 광배의 형태에서 성당시대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대일여래의 우측에 박락된 부분이 보인다. 2)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된 견화본 팔대보살만다라. 보살들은 개념적으로 중앙의 대일여래의 사자좌이며, 여래와 한 몸이자 여래의 갖가지 덕목이다.
1)유림 제25굴 동벽 팔대보살만다라. 존상의 표현 수법이나 광배의 형태에서 성당시대의 것과 차이를 보인다. 대일여래의 우측에 박락된 부분이 보인다. 2)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된 견화본 팔대보살만다라. 보살들은 개념적으로 중앙의 대일여래의 사자좌이며, 여래와 한 몸이자 여래의 갖가지 덕목이다.

안사의 난 이후 당은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때 서쪽 고원지대에 자리하던 토번이 세력을 확장하고, 돈황 일대(과주, 사주)는 약 60년의 토번 통치 시기(中唐. 781~848)를 맞이한다. 과주(瓜州)에 자리한 유림석굴 중 제25굴은 이러한 환경에서 조영된 석굴로서(822년 전후), 한문화와 토번문화가 공존하는 기념비적 석굴이다. 주실의 남북벽에는 각각 성당 시기(盛唐. 705~781)의 화풍을 계승한 무량수경변과 미륵하생경변이 아름답게 장엄되었다. 그런데, 주존상 뒤에 자리한 동벽의 벽화는 양식과 내용에서 모두 기존과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어 시선을 끈다. 

동벽 화면 중앙에는 세 마리의 사자가 자리한 사자좌에 커다란 연꽃이 피어있다. 그 위에 보살 형상의 존자가 선정인을 한 채 가부좌를 틀었다. 화려한 보관 사이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고, 귀와 목과 팔은 온갖 보배로 장엄하였다. 잘록한 허리선은 관능적이지만 동시에 너른 어깨와 여유로운 미소가 힘과 의연함을 드러낸다. 우측에 적힌 방제를 통해 이 존상이 ‘청정법신 노사나불’임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돈황석굴에서 노사나불은 몸에 중생 육도(六道)를 그린 법계인중상으로 그려졌던 점을 생각하면(연재 24회), 그 형상이 매우 이색적이다. 더군다나 보살의 모습이 아닌가! 

다시 ‘노사나불’의 좌측을 보면 역시 화려한 보관과 보배로 장식한 네 분의 보살이 상하에 두 분씩 연꽃 위에 앉아있다. 보살들은 그 형상과 자세가 각각 다르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저마다 손에 든 지물이다. 이 보살들의 존명 역시 남아있는 방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상단 우측에 녹색의 몸에 오른손에 검을 든 보살은 ‘허공장보살’이며, 그 좌측의 오른손으로 마니보주를 받들고 보살은 ‘지장보살’이다. 하단 우측의 보살은 오른손엔 푸른빛이 도는 연꽃봉오리 줄기를, 왼손엔 정병을 쥐었으며, 보관에는 탑이 장식된 ‘미륵보살’이다. 그 좌측의 보살은 오른손엔 연꽃 줄기를 쥐고, 왼손으로 연꽃을 받치고 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렇다면 ‘노사나불’ 우측에도 이와 대칭하여 네 분의 보살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우측의 벽면은 박락되어 본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돈황학자 샤우텐(沙武田)은 우측 벽면이 완전히 박락되기 전의 사진 및 조사기록들을 추적하여 원래 ‘금강장보살(금강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무장애보살(제개장보살)’이 자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동벽의 벽화는 ‘노사나불’을 위시하여 허공장·지장·미륵·문수·금강수·보현·관음·제개장 등 8대보살을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당 시기 선무외·금강지·불공의 개원삼대사(開元三大士)가 중국에서 활약하면서 밀교가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8대보살에 관한 경전과 의궤가 연이어 번역되면서 신앙 또한 확산하였는데, 그중 가장 대표할 만한 경전이 불공역 ‘팔대보살만다라경’이다. 이 경에서 세존은 ‘팔만다라’, 즉 팔대보살의 깊고 깊은 법요를 건립하는 방법을 설하시는데, 그 내용이 간결할 뿐 아니라 각 보살의 형상, 수인, 지물, 위치, 심지어 몸의 색까지 명확히 제시하고 있어, 도상의 제작에도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작품에서는 엄격한 작례를 따르지 않고 형상과 지물 및 배치에 있어 작품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역본의 유통과 화사의 창의성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장경동 출토 견화본(Ch.0047)과 티베트 지역에 현존하는 다수의 유물은 25굴의 팔대보살만다라가 8~9세기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직접 유입된 밀교 경전과 도상의 영향하에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25굴을 필두로 돈황석굴에서 팔대보살만다라가 꾸준히 유행하였다. 

만다라(曼茶羅, Mandala)는 현장법사 이전에는 단(壇), 이후에는 취집(聚集)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사각형 또는 원형의 단을 만들어 여래와 보살들을 모신 후 공양하고 관상수행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밀교에서는 만다라를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마치 바퀴의 축을 중심으로 낱낱의 살이 모여 수레바퀴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었다는 뜻이다. 25굴 동벽 중앙의 ‘노사나불’은 엄밀히 말해서 밀교경전의 교주이자 법신불인 대비로자나불, 즉 대일여래이다. 대일여래가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 여래의 존격이 태장계 대일여래임을 나타낸다. 선무외역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대일경)’에서 설하기를, “여래께서 광대금강법계궁(廣大金剛法界宮)에 머무시고…보살의 몸으로 사자좌를 이루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법신으로서의 여래가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을 수행의 구경으로 삼고, 보살정신의 구현을 일체행의 기초로 삼고 있음을 천명하는 대목이다. 

사자좌에 앉으신 여래를 위에서 내려본다고 가정한다면, 마치 여래를 중심으로 보살이 둘러싼 형국이다. 이때의 보살들은 여래의 갖가지 덕목에서 비롯된 존재이며, 동시에 여래와 차별 없는 하나의 몸이다. 25굴 동벽의 보살들의 연화대좌가 대일여래의 대좌 아래서부터 서로 줄기로 연결되어있는 점은 바로 이런 사상을 시각화한 듯하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밀교에서 만다라가 무엇을 도상화한 것인지, 대일여래가 왜 보살의 몸으로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팔대보살이 어떤 의미로서 나타난 것인지, 나아가 성당 이후로 왜 그렇게 다양한 보살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03호 / 2023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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