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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 일엽 스님 삶·사상 재조명

  • 불서
  • 입력 2023.11.13 11:36
  • 수정 2023.11.13 11:42
  • 호수 1704
  • 댓글 0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
박진영 지음 / 김훈 옮김/468쪽 / 2만5000원

십수년 간 일엽 스님 연구 천착한 박진영 교수, 평전 형식 연구서
“격동의 시대에 구습 깨고 당당히 자신의 삶 개척한 인물” 평가

1920년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개화기 여성운동가, 출가 후에는 선불교의 맥을 이은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평전 형식의 연구서다.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여성으로, 지식인으로, 종교인으로,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답을 찾아 나선” 일엽 스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앞서 2017년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Engaging Zen Master Kim Iryop(여성과 불교철학 : 김일엽 선사를 통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이번에 한국 독자들을 위해 번역됐다. 

1896년 목사였던 부친과 기독교 신자였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스님은 20세기 초 ‘신여성’으로 대변되는 인물이었다. 진보적 교육관을 가졌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독교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고, 이화학당을 나와 일본 동경 유학을 거치며 당대 최고의 엘리트 여성으로 성장했다. 

1920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성’을 창간해 신여성운동론을 전개하며 세상의 이목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등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랬던 ‘신여성’은 1933년 수덕사 만공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이후 30여년간 절필하며 올곧이 출가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당시 비구니 총본산격인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승을 맡아 생애 대부분을 눕지 않고 정진하는 치열한 수행으로 만공 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는 등 수행자로서도 일가를 이뤘다. 만년에는 수덕사 산내 암자인 환희대에서 10년을 주석하며 대중 포교에 대한 열정으로 ‘어느 수도인의 회상’과 ‘청춘을 불사르고’ 등을 펴내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일엽 스님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가 그려 놓은 틀을 깨기 위해 노력한 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였고, 이후 삶의 근본적인 의문을 풀기 위해 구도자로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학계에서 일엽 스님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특히 ‘신여성운동가’와 ‘승려’라는 두 길을 걸었던 스님의 삶에 대해 전혀 다른 삶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실제 일엽 스님의 삶을 둘러싸고 일각에서는 “불교에 귀의한 일엽의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이라고 주장하거나 “일엽이 출가하면서 여성 문제에 대한 참여를 포기했고, 이전에 추구하던 신여성의 사명을 배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엽 스님을 신여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잘못된 해석”이라고 단언했다. 
 

일엽 스님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문인, 개화기 여성운동가, 출가 이후에는 선불교 맥을 잇는 수행자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일엽 스님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문인, 개화기 여성운동가, 출가 이후에는 선불교 맥을 잇는 수행자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저자에 따르면 일엽 스님이 남긴 많은 글에서 다양한 문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의 추구”다. 

저자는 “신여성으로서 일엽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자아와 자유 추구에 있다고 믿었다. 이는 곧 그녀가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던 것”이라며 “반면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사유의 폭을 넓혔다. 그것은 곧 출가자로서 절대적 자유, 영원한 자유를 찾는 길이었다”고 했다. 결국 ‘자아와 자유 추구’는 출가 이전이나 이후 스님의 삶에서 사유의 핵심 키워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대 종교철학과 교수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서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0년대 중반 한국 근대불교를 연구하다 우연히 한국의 비구니 일엽 스님에 대해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곤 “격변의 시대에서 구습을 깨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치열했던 삶에 깊이 매료됐다. 박 교수는 이때부터 일엽 스님 연구에 천착했다. 

그러나 스님의 삶을 좇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관련 연구는 많지 않았고, 스님이 남긴 저술 또한 대부분 절판된 상태였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중고서적을 샅샅이 뒤졌고,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관련 기록들을 수집했다. 기록들을 일일이 대조하며 일엽 스님이 지나온 삶의 연대기를 퍼즐 맞추듯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거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스님의 삶을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해 냈다. 때문에 이 책은 십수 년간 고집스럽게 일엽 스님의 삶을 추적해 온 저자의 발자취이기도 하다. 
 

저자는 “나는 불교학자로서 ‘여성과 불교’라는 주제를 연구하며 김일엽이라는 존재를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김일엽 세대의 많은 한국 여성들에게 그녀는 단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아니면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게 했던 사람이었다”며 “내가 이 책에서 보이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밝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704호 / 2023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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