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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늦깎이 - 전영관

기자명 동명 스님

슬픔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자

​​​​​​​늦게 출발한 사람이 늦깎이
늦게 세상 알았다는 의미도
뒤처진 느낌은 욕심서 비롯
우리는 있는 그대로 훌륭해

어디에 앉혀놔도 등신이었지만
시라는 거울 앞에 서면
척추가 휘어진다

초대장도 없이 잔치 구경 간 실업자같이
기웃거리는 습성을 대인 관계라 착각했다

사람을 넓혀야 한다고 욕심부리다가
기념사진의 병풍 노릇까지 해봤다

감기 걸렸다고 이불이나 탓하는 얼뜨기여서
타인의 재능을 노력으로 메우려 헛발질했다

비굴은 치욕을 성형한 생필품

재촉하는 이 없는데 결승선 같은 것 없는데
지각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알았던 노래의 2절처럼
모임마다 가벼운 낯설음으로 채워졌다

웃더라도 타인들이 내 행복을 시기하지 못하도록
최초의 미소를 만들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웃음소리를 내보고 싶다

등신이라며 자책했다
또다른 등신들을 보는 눈이 생겨서 안도했다
타인의 불행을 과장해서 내 불행을 지우는
비법도 알게 되었다

거듭하다 보면 슬픔도 태도가 된다

(전영관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2020)

‘늦깎이’는 없다. 나이 들어 출가한 사람을 ‘늦깎이’라고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이르다, 늦다 하겠는가? 출가를 발심한 그 순간이 출가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는 날 출가한 수밧다의 나이는 120세였다.

“외도가 출가할 경우에는 4개월의 견습기간이 있습니다. 그래도 출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4개월의 견습기간이 필요하다면, 저는 4년의 견습기간을 갖겠습니다.”

부처님은 4년의 견습기간을 감수하겠다는 수밧다에게 바로 구족계를 주셨고, 수밧다는 오래지 않아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한다.

늦게 출가한 이를 뜻하는 ‘늦깎이’라는 단어가 어떤 분야에서건 늦게 출발한 사람을 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 시에서 늦깎이는 시인으로서 늦게 출발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늦게야 ‘세상’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

​“어디에 앉혀놔도 등신”이라는 표현은 좀 과하지만, 시의 화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시 앞에 서면 눈은 높고 능력은 따라주지 않아서 ‘척추가 휠 정도로’ 버겁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자신의 능력에 비해 눈만 높다. 능력이 아닌 다른 요소가 성패를 가르는 경우를 보면,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얼굴이라도 비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도장’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대인관계로 착각했다고 화자는 뉘우친다.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사람은 항상 뒤처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화자는 “재촉하는 이 없는데 결승선 같은 것 없는데/ 지각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달라져서, “웃더라도 타인들이 내 행복을 시기하지 못하도록/ 최초의 미소를 만들고” 싶어졌다. 아무도 모르는 웃음소리를 내보고 싶어졌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설사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기 힘들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겠다고 다짐했다.

진실을 뒤늦게야 알아서 시인은 스스로를 ‘늦깎이’라 부른다. 진실을 깨닫고 보니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등신’들이 보인다.

“슬픔도 태도가 된다”라는 말을 오래 곱씹어본다. 슬픔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자.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부족하다고 자학하지 말자. 모든 사람이 똑같이 시를 잘 써야 하는 것 아니듯이, 똑같이 말을 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잘생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훌륭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 가장 어울리게 생겼고, 나름대로 자신에게 어울리게 살고 있다. 부처님 말씀대로,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가지되, 누운 풀처럼 겸손해지자.”(‘잡보장경’)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04호 / 2023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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