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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의 단상

기자명 진원 스님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종일 한 사람도 만날 수 없는 암자에 주석하고 있다. 마당에 서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는 엊그제 내린 된서리에 잎을 모두 내려놓았고, 그 단풍나무를 딱따구리가 시끄럽게 쪼아대고 있다. 나한님은 산 중턱부터 내려온 큰 너럭바위 아래 깊은 굴속에서 촛불 하나 의지해 깊은 선정에 들어계시고, 바위굴 주위에는 산신님 칠성님이 옹기종기 둘러 않아 소임을 다하고 있다. 한가로운 일요일에 기분 좋게 청소를 끝낸 정갈한 도량에는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앉고 있다. 

가사장삼 두른 나는 부처님과 독대하고 있다. 부처님은 구중궁궐과 같은 도솔천 적멸궁에 앉아 계시고, 법당 천정에는 용들과 사천왕이 옹호하고 있다. 부처님 영산 당시 1250인의 제자들과 사부대중에 섞여 있는 나를 본다. 조용히 ‘금강경’을 펼치고 목탁의 높낮이에 맞추어 독경을 한다. 내 입을 통한 독경은 내 귀를 통해서 내 몸에 흐른다. 끝없이 묻고 답하고 그렇게 법문을 알아들어 의문이 없어질 때까지 이어지는 문답에 나도 모르게 감동이 이입된다. 

부처님 당시의 법을 설하는 모습이다. 제자 중 한 명이 우요삼잡(합장하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하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대중을 대신해서 묻고 답하는 형식이다. 세계 어느 종교도 스승과 제자가 묻고 답하는 형식을 취한 종교 지도자는 없다. 모든 부분이 대중을 대신해서 부처님의 깨달은 법에 대해서 궁금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하는 부분들을 묻고 답하는 형식이다. 중요한 것은 한번 묻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론 본론과 결론 그리고 기승전결의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동석자를 대신한 질문자의 의문이 풀리고 동의하는 형식으로 법문은 끝난다. 불교는 교주와 불자가 서로 상호적이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타운홀 미팅처럼 둘러앉아 질문하고 답하며 수준에 맞게 대기설법하는 대단한 소통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끔 불자들이 수행 자랑을 한다. ‘금강경’을 몇 번 읽었고,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몇 번을 외우고, 사경을 몇 번 했고 등의 수행담이다. 그러나 내용을 물으면 대부분이 모른다. 몰라도 많이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 모양이다. 부처님과 독대해서 독경을 하는 것은 부처님 들으시고 복을 달라고 하는 수동적이고 타력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하신 말씀이 내 인식을 변화시키고, 행위를 변화시키고, 내 삶을 변화시켜 종국에는 깨달음에 가게 하는 능동적이고 자력적인 것이다. 경전을 많이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이 수행의 척도가 아니라 읽은 만큼 내 삶과 나를 둘러싼 공동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자신의 문제와 공동체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내 안에 은밀하고 미세해서 나 자신조차도 느끼지도 못하는 숙명과 같은 번뇌, 그리고 아주 거칠고 노골적인 갈등, 분별, 차별, 분노와 같은 공동체를 향한 번뇌는 내 삶과 공동체를 흔들어 댄다. 마치 번뇌를 생산하는 공장처럼, 그 번뇌들은 내 안에 흐르는 윤회이기도 하고, 우리 공동체의 업이기도 하다. 수행의 길라잡이가 되는 경은 아함의 교훈이기도 하고, 방등의 선업이며, 반야의 진공묘유이며, 화엄 법화의 법장이다. 아함은 선악의 가르침이며, 방등은 나와 우리 공동체가 지은 모든 업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평등하며, 법화와 화엄은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가 보배이고 나 자신이 보배이며 아름다운 하나의 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각해서 자기의 삶이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독경이 끝났는데도 딱따구리는 아직도 나무를 쪼아대고 있다. 가끔씩 들리는 등산객들은 절에 인적을 찾는다. 부처님을 찾는 고마움에 애써 ‘차 한잔 하시지요’ 불러 세운다.

진원 스님 suok320@daum.net

[1705호 / 2023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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