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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무장투쟁과 강제이동의 문제 - 상

안전·평온한 거처는 모든 존재 누려야 할 권리

어떤 형태의 무장투쟁이든 살상과 난민 및 강제 이동 고통 발생
승가 구성원의 거처 마련 규범은 강제 이동에 참고할 내용 담아
안전하지 않은 거처 빨리 떠나야 하며 집착하지 않는 태도 필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파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파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이 시각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국지전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형태의 무장투쟁이든 민간인 살상과 난민 및 강제이동의 고통을 발생시킨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상처는 다시 인간이 아물게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 글은 크리스티나 A. 킬비(Christina A. Kilby)가 쓴 ‘강제이동과 책임에 대한 법률적 추론: 불교 승가의 규율과 국제 인도주의 법(IHL) 간의 대화(Legal Reasoning About Displacement and Responsibility: A Dialogue Between the Buddhist Monastic Discipline and IHL)’(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 30, 2023)를 바탕으로 무장투쟁과 강제이동의 문제를 불교의 입장에서 한 번 살펴본 것이다.

불교의 승가 규범은 언뜻 보면 IHL과의 대화에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승가의 규범이 실제로는 IHL의 강제이동에 관한 논의와 유사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승가의 규범은 이른바 “집 없는” 삶을 위해 고안된 것이긴 하지만, 승가의 거처와 안전을 제공하고, 그들의 기본적인 존엄성 확보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는 IHL에서 핵심적으로 고려하는 관념이기도 하다. 승가의 규범은 출가의 삶을 채택한 사람들조차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집과 거처를 위한 최소한의 관련 규정들을 제시했다. 이 규범들은 민간인들의 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맥락에서 IHL의 적용에도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집과 거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둘째, 승가 규범은 높은 수준의 신중함, 즉 IHL에서 “변함없는 배려”라고 불리는 윤리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율장’에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행위규칙이 있을 때 이 금지된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인과적 요인들을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추가적인 규칙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규범들은 해당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건전하지 않은 행위를 초래하는 원인과 조건들에도 귀를 기울인다. 이처럼 승가의 규범들은 승가공동체 안에서 해악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인 행위들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행위들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법률적 추론의 습관’을 함양하고 있다. 이는 변함없는 배려, 예방책, 사전경고에 관한 IHL의 규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 승가 구성원의 거처와 관련하여 ‘율장’ 문헌의 세부적인 규정들은 건축 지역과 사용해야 할 재료 및 구조물의 크기와 외양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주거지 건설을 통제하고 있다. 상좌부의 바라제목차에 의하면 교단의 주거지는 “방해물이 없으면서” “적당한 공간”을 가진 곳이어야 한다. 비구 타니사로(Thānissaro)에 의하면, “방해물이 없는 장소는 (1) 건물에 해악을 끼칠지도 모를 흰개미, 개미 또는 쥐들과 같은 생물의 서식지가 아닐 것. (2) 그곳은 거주자들에게 해악을 끼칠지도 모를 뱀, 전갈, 호랑이, 사자, 코끼리, 또는 곰들과 같은 생물의 서식지가 아닐 것 등이다. 주석서는 비구가 흰개미와 다른 작은 동물들의 집이 있는 장소에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한 ‘수타 비방가(Sutta Vibhanga)’의 의도는, 그들의 둥지를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그들과 그 외 다른 작은 생물들에 대한 붓다의 자비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적당한 공간’은 손수레나 사다리를 든 사람이 건설 예정지 주변으로 가는 길목에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복주(復註)에서는 적당한 공간이란 조항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 오두막이 절벽 가장자리나 낭떠러지 벽 옆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승가의 거처에 관한 이런 규칙들은 안전과 평온, 지속가능성 및 그 장소에 사는 동물 거주자들에 대한 자비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유재산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는데, 남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은 승가 공동체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법률적 시비도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 유행하는 것만 고조된 위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에 그대로 머무는 것도 주변의 환경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다. 율장의 안전 기능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로서 붓다는 우기의 안거 기간 동안 위험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 예외규정을 허용했다. 상좌부의 바라제목차에 의하면 우기의 안거는 예컨대, 수행자가 “그들을 붙잡고 공격하는 짐승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거나, 그들을 물고 공격하는 기어 다니는 곤충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거나, 그들을 강탈하고 때리는 범죄자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거나, 그들의 영혼을 점거하고 생명력을 빼앗는 악귀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은, 자신들의 복지에 대한 위험들을 만난다면, 계율을 위반하지 않고도 끝낼 수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율장 문헌 밖이긴 하지만, ‘카차파 자타카(Kacchapa-jātaka)’에서도 승가의 삶과 강제이동의 문제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호수가 말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흙 속에 있는 자기 집을 떠나기 싫어했던 어떤 거북이에 관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가까운 강으로 이동했지만, 그 거북이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자신의 몸을 진흙 속으로 고집스럽게 묻는 동안 거북이는 진흙을 긁어모으던 도공(陶工)의 삽날에 찍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 도공은 전생의 붓다였다. 이 거북이가 쓰러져 죽어가자 도공은 자기가 살던 집에 너무 집착하다가 목숨을 잃게 된 그 거북이를 나무랐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게송들은 그 설화가 경장과 율장 속에서 더 큰 피난처와 안전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건들이 안전하지 않으면 집과 서식지를 탈출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관념을 강화하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은 집착하지 않는 태도, 즉 ‘무아’의 모델로서 필요하다면 이동하고, 또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본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카차파 자타카’의 에피소드는 인도주의적 회랑(回廊)의 필요성과 안전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법률적 규정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705호 / 2023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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