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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노동으로 점철된 조선후기 스님들의 나날 

기자명 민순의

과도한 공물·노역 강제해 정신적·육체적 수탈

대동법 시행으로 종이 생산 멈추자 사찰을 제지소로 활용
왕실 인사 무덤 관리 담당하며 제수물품 납부·잡역 투입돼 
양반들 절 찾아 유흥 즐기기도…사찰 떠난 스님 적지 않아

남해 화방사 전경과 병오년 ‘지회절목’ 완문(完文)의 사본. 완문에는 화방사에서 지회 마련 중 겪었던 불편함을 덜어주고 종이 제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담겨 있다. [화방사]
남해 화방사 전경과 병오년 ‘지회절목’ 완문(完文)의 사본. 완문에는 화방사에서 지회 마련 중 겪었던 불편함을 덜어주고 종이 제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담겨 있다. [화방사]

광해군 즉위년(1608) 대동법(大同法)이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광해군일기’ 중초본 4권, 즉위년 5월7일. 시행 당시 첫 명칭은 ‘선혜법(宣惠法)’이었다) 고을마다 물품으로 진상하던 각종 공물(貢物)을 쌀(대동미(大同米))로 일괄하여 대신 내게 했던 이 법은 이후 10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 일부 불교계에 미친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정은 이러했다.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공물로 납부되었던 지물(紙物)이 대동미로 흡수되고 지방 관청에서 더 이상 종이를 생산하지 않게 되자, 사찰을 제지소(製紙所)로 활용하게 되었다는 것.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상도 남해의 화방사(花芳寺)였다.

용문사(龍門寺)와 함께 남해를 대표하는 사찰인 화방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다시 중건되었는데, 남해 앞바다가 바로 노량해전의 전장(戰場)이었던 관계로 조선 후기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忠烈祠)를 수호하도록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화방사가 위치한 망운산(望雲山)이 종이의 원료가 되는 산닥나무의 자생지인 까닭에(정책뉴스-‘멸종위기종 산닥나무 자생지 복원된다. 천연기념물 제152호…남해 망운산 화방사 인근 숲에’, 2012.09.20. 산림청), 대동법의 전국적인 확대에 즈음하여 화방사에서는 망운산 산닥나무 자생지를 저전(楮田)으로 삼아 지역(紙役) 즉 종이의 생산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산된 종이는 중앙에 진상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감영, 남해현, 서원, 서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바쳐졌다. 화방사 스님들의 지역이 어찌나 고되었던지 본 임무인 충렬사 수호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화방사의 종이 생산에 대해서는 이상백의 ‘조선 후기 남해 화방사의 제지(製紙)와 서적 간인(刊印) 연구’(‘서지학연구’ 89, 2022) 참조.)

이 시기 조선의 스님들은 왕실의 능(陵), 원(園), 묘(墓)와 진전(眞殿) 등에 제수 물품과 승역을 제공하기도 했다. 능과 원, 묘는 모두 왕실 인사들의 무덤이지만,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을 낳은 후궁 등의 무덤은 원, 기타 왕족의 무덤은 묘라 하여 차별이 있었다. 진전은 어진(御眞) 즉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처소를 말한다.

사실 조선 초부터 대부분의 능원(陵園)에는 사찰이 설치되어 있었다. 국초에는 재궁(齋宮), 명종 대 이후로는 능사(陵寺) 또는 능침사(陵寢寺)라 불렸던 이들 사찰은 능원의 수호와 함께 선대 왕후(王后)에 대한 추천재(追薦齋)라는 종교의례적 업무가 부과된 일종의 공적 기관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능침사의 추천재가 폐지되면서 이들은 점차 조포사(造泡寺)라고 불리게 되었다.(‘일성록’ 정조 10년(1786) 윤7월12일. 당년 5월 사망한 왕세자의 발인을 위한 자원자 목록에 ‘영우원(永祐園: 사도세자의 무덤)의 조포사 승려 15인’이 기재되어 있어, 그 용례가 확인된다.)

조포사는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으로 이전부터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통용되던 말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능침사에 대한 대체 개념으로 사용되게 되었으며, 실제로는 기존의 능침사에서 행하던 종교의례 기능이 제외된 채 능원뿐 아니라 묘와 진전의 관리도 담당하며 이에 필요한 물품과 잡역(雜役) 일체를 제공해야 했다. 그럼에도 ‘조포(造泡)’라는 글자가 존속했던 것은 당대인들의 인식에 두부가 중요한 제사 음식이었다는 것과, 그토록 중요한 두부를 잘 만들기로 스님들만한 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상 조선 후기 조포사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서는 탁효정의 ‘조선후기 조포속사의 운영 실태: 파주삼릉의 미황사 사례를 중심으로’(‘남도문화연구’ 40, 2020) 참조.)

사실 종이와 두부의 제작은 그 공정이 적지 않게 까다로워 상당한 정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왕실에 대한 진상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었기에 노동의 강도와는 별도로 노역하는 스님들이 자부심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전국 각지의 사찰에는 훨씬 더 어수선하고 모욕적인 공물의 품목과 잡역들이 부과되고 있었고, 심지어 그 납입의 대상이 지방의 관청이나 아전, 또는 양반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보은의 법주사에서는 빨랫돌과 다듬잇돌, 메주와 산나물 등을 만들어 바쳤고(함풍 6년(1856) ‘완문(完文)’), 해남의 대둔사(현 대흥사)에서는 동백기름을 짜 올렸으며(광무 3년(1899) ‘완문’), 순천 송광사에서는 송화(松花)가루, 염죽(染竹), 각종 목판, 심지어 웅설(熊舌: 곰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라고 한다. 필자는 이것이 웅담(熊膽)의 오기일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을 요구받기까지 하였다(‘송광사지(松廣寺誌)’). 

육체적 정신적으로 과도한 이 같은 수탈에 사찰을 떠난 스님들도 적지 않았다. 순조 27년(1827) 양산 통도사의 스님들은 경상도 수군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각종 잡역에 응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데, 바쳐야 하는 종이의 품목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독촉은 쉬지 않고 내려오니, 어느 짬에 먹고 잘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고된 노동 때문에 당초 500~600명을 헤아리던 스님들이 절을 떠나 이제 40~50명만 남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통도사 ‘의송(議送)’). (이상 조선 후기 일선 사찰의 잡역 내용에 대해서는 정광호의 ‘이조후기 사원잡역고(李朝後期 寺院雜役考)’(‘사학논지’ 2-1, 1974) 참조.)

하지만 이 당시 스님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장 힘든 일은 어쩌면 양반들의 유흥을 뒤치다꺼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이 쓴 다음 글에 그와 관련된 어지러운 상황과 처참한 심경이 여실히 전해진다.

“몇 사람의 관인(官人)이 휴가를 얻어 노래하고 춤추는 자들을 데리고 승방(僧房)에 가서 놀았는데, … 한 스님이 듣고 웃으면서 ‘존관(尊官)은 한나절 한가로움을 얻지만, 노승은 도리어 사흘 동안 바쁘게 되었습니다.’ 하였으니, 하루는 장막을 치고 하루는 모여서 놀고 하루는 청소를 해야 함을 말한다. 현령이 절에서 한 번 놀면 승려가 평소 소비하는 비용의 거의 반 년분을 쓴다. 일행들이 술‧밥‧담배‧신발 등을 으레 억지로 갈취(토색(討索))하고, 또 만약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연주하며 창우(倡優)들을 시켜서 잡희(雜戱) 놀음을 벌이면 구경 온 남녀들이 모두 승려에게 밥을 요구하게 되니 그들이 견뎌내겠는가. 혹시 돈과 쌀을 주어 그 비용을 갚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록 현령의 면전에서 친히 준다고 하더라도 현령이 문 밖만 나서면 이속(吏屬: 아전 무리)과 관노(官奴)들이 빼앗아 가버린다.”(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권2, ‘율기(律己)’ ‘칙궁(飭躬)’.)

이처럼 어려운 대외적 환경에 놓여있었던 조선 후기의 스님들은 대체 어떻게 수행하며 불사(佛事)를 이루었던 것일까?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705호 / 2023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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