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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성주사 주지 법안 스님

보시로 자기를 비우면 나는 자유롭고 상대는 행복해집니다

개인의 업이 모여 작은 공동체·사회·국가와 인류의 공업 돼
좋은 마음으로 신선한 에너지 발하면 마주한 대상도 맑아져
수행 통한 통찰·지혜로 상대 이익되고 따뜻하게 함이 자비심

법안 스님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덜어내는 것이 비움이며, 덜어낸 만큼 여백이 생기고 그만큼 자유롭게 될 것”이라며 비우고 덜어내는 삶을 당부했다.
법안 스님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덜어내는 것이 비움이며, 덜어낸 만큼 여백이 생기고 그만큼 자유롭게 될 것”이라며 비우고 덜어내는 삶을 당부했다.

입동이 지나면 울긋불긋하게 아름답고 조화롭던 가을 산에 낙엽이 집니다. 그리고 모든 잎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한 생을 살다가 저물게 되면 본래 온 바 없이 왔던 그 자리로 다시 가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똑같습니다. 이 이치를 알아차린다면 허덕거리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움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알제리 태생의 피에르 나비라는 농부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을 피라미드처럼 탑을 쌓아 보면 제일 아래에는 일반 민초들이 천천히 걸어서 살아갑니다. 시속 6km 정도 되는 속도로 인류 대다수가 살아갑니다. 두 번째 칸에는 돈이 조금 더 있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게 되면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2배 정도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좀 더 돈이 생기면 오토바이를 사고 조금 더 부자가 되면 자동차를 삽니다. 그렇게 점점 높아지죠.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더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 더 빠른 속도인 비행기를 탑니다. 비행기는 시속 800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 위를 향해 1800km까지 올라가는 콩코드라는 비행기를 타고 달려갑니다. 

우리 인생의 속도가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에서는 모든 사람이 시속 2만8000km로 달려갑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만족을 극대화하며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가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현상은 모두 더 빠르고 안전한 비행기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든, 일에 대한 집착이든, 사람에 대한 집착이든 하고자 하는 것 하나가 성취되면 거기에 자족해서 평화롭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위를 향해서 끝없이 갑니다. 이러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라는 큰 사회가 함께 업을 짓게 됩니다. 

우리는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목숨은 허망하게 갑니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 1주기가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차별하게 살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시속 2만8000km로 달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성취되지 않는 욕망이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가 되면 훨씬 더 문명적으로 발전하고 더 평화롭고 행복하고 서로 공존·공생해야 하는데 삶은 오히려 더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약자를 더 심하게 짓밟습니다. 이런 공동체의 업은 결국 우리 하나하나의 개인적 존재의 업이 모여서 작은 공동체의 업이 되고, 한 사회의 업이 되고, 국가나 인류의 공업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삶 자체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내재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행복의 싹이 트고 행복 속에서 고통의 싹이 트는 것입니다. 숲에 있는 나무나 꽃, 잎을 보면 그 하나에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함축돼 있습니다. 그 속에는 비와 구름이 있고 태양의 빛과 바람, 토양이 있고 강물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나뭇잎, 꽃잎에 다 담겨 있습니다. 모두 다 다른 요소로 형성돼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모두 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연기적 상호관계라고 표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고 의지하는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신선한 에너지를 가지고 나 자신의 마음이 맑아지면 나와 마주하고 있는 대상도 점점 맑아진다는 겁니다. 마치 ‘카오스이론’ 같이 우리 선근의 인연이 한 번 원력을 세워 물결을 치게 되면 그 물결이 나를 넘어 가족, 이웃, 사회로 퍼지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칼릴 지브란의 고전 ‘예언자’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조금밖에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주되 많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다. 그러므로 그들의 욕망이 그 선물마저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생명을 믿고 생명을 아낌없이 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는 법이 없다.” 

비움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내게 되면 덜어낸 만큼 여백이 생깁니다. 여백이 생긴 만큼 마음은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나는 자유롭고 평화로우면서 상대방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자기 비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켜켜이 쌓여서 사회적으로 물결이 치는 것을 공덕이라고 합니다. 나 자신의 비움과 사회적 비움이 함께 우리 사회를 깊이 있게 물결친다면 비움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 시 상수 제자로 정법안장을 받은 마하가섭존자를 여러분께서는 잘 아실 겁니다. 마하가섭존자는 두타행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심어주는 역할을 많이 하셨습니다. 가섭존자가 탁발할 때 유명한 일화입니다. 지금으로 표현하면 한센병 환자가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본래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것은 자기가 먹고 남은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먹는 음식을 4등분 내지 3등분 해서 한 부분을 떼어 공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어야 할 몫을 상대에게, 거룩한 현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성스러운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한센병 환자다 보니 손가락이나 발가락에 감각이 없습니다. 밥을 뜨다가 손가락 하나가 툭 하고 부러져 버렸습니다. 손가락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바리때에 같이 담겨서 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하가섭존자는 아무런 불편한 표정도 없이 손가락을 한쪽으로 치우고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공양을 드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는 사람도 자기의 몫을 일부 줬는데 그 공양을 받는 수행자도 그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주되 준 바가 없고 받되 받은 바가 없는 모습입니다. 

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먹고 살기 어려웠고 보릿고개 때는 더 힘들었습니다. 한 사찰에서 새벽 예불이 끝나고 조실스님이 경내를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곳간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가보니까 어떤 사람이 쌀가마니를 올린 지게가 무거워 일어서질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실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가서 지게를 질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줬습니다. 지게가 갑자기 들리니 이게 웬일인가 하며 뒤를 돌아봅니다. 스님은 어서 가라며 손짓을 합니다. 이 사람은 쌀을 훔치러 온 도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실스님은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본 겁니다. 이 보릿고개에 얼마나 힘들면 어두울 때 이렇게 와서 쌀을 짊어지고 가려 했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천근같이 무거울까.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가는 그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그 일을 계기로 이후 절대 도둑질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이것이 비움에 대한 아름다움입니다. 

라틴어에 ‘피난처’를 의미하는 ‘레푸기움(refugĭu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레푸기움은 빙하기 시절 모든 생명체가 멸종했을 때 생명이 피할 수 있었던 공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시련과 고통,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레푸기움를 가지려고 합니다. 마음에 대한 레푸기움이 필요하고 공간에 대한 레푸기움이 필요합니다. 또 시간에 대한 레푸기움도 필요합니다. 일상의 반복적인 삶이 너무 지루하고 피로가 누적될 때에도 나만의 레푸기움이 필요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부처님 도량입니다. 하루에 3분이라도 자기만의 레푸기움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의 씨앗입니다. 레푸기움이라는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평화롭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근본은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자기 마음이 멈춘 상태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무심의 상태로 대상을 봤을 때 거기서 나오는 마음의 통찰적인 지혜입니다. 통찰적인 지혜로 일상에서 상대를 이익되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것이 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자비심은 자기 비움이 형성됐을 때 가능한 겁니다. ‘하심하라’는 말도 자기 마음을 열라는 뜻입니다. 자비심으로 형성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에너지가 형성된 것을 삼매라고 합니다. 이 삼매를 얻게 되면 말과 생각 행동이 깊어지고 또 거기에서 신묘한 힘이 생깁니다. 그 삶을 우리는 고요한 행복이라 얘기하고 그 삶의 주인공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선재’입니다.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선재입니다. 그런 주인공이 되시길 바라며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10월29일 부산 여래사불교대학 ‘선지식 친견 성지순례-제9차 창원 성주사 순례’에서 성주사 주지 법안 스님이 ‘비움에 대한 아름다움’을 주제로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1705호 / 2023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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