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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고왕암 주지 견진 스님

새·나비와 소통하며 나와 자연 둘 아닌 ‘불이 가치’ 설파

다섯 살 때 “절에 간다!”
고교 졸업 직후 보경사로

출가 허락 않는 어머니께
‘북정시’ 보이며 의지 표출

산딸기·진달래로 허기
메우며 걸어서 100일 만행

광덕 스님 즉답 한마디에
‘스님 자긍심’ 채우고 다져

31명의 백제 왕 넋 위로
국태민안·남북통일 염원

“일체중생 개유불성이니
모든 생명 고귀한 존재”

새는 자비를 신뢰로 감지
매해 철마다 찾아와 ‘재롱’

“자연, 인간에 예속된 환경
아닌 주체적 존귀한 존재”

고왕암 주지 견진 스님은 “자연 자체가 고귀한 존재”라며 “그러기에 일체중생과 자연은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고왕암 주지 견진 스님은 “자연 자체가 고귀한 존재”라며 “그러기에 일체중생과 자연은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견진 스님이 내어 보인 자비를 나비는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감지한다.
견진 스님이 내어 보인 자비를 나비는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감지한다.

지상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던 5월 출판된 산문 시집 ‘계룡산에서 자연을 노래하다’는 놀라움을 선사했다. 시적 상상력이나 서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솔하게 적어 간 글의 행간과 저자가 직접 앵글에 담은 70여 종의 꽃, 새, 나비의 사진에서 자연이 전하는 이치와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고 보았기 때문이다. 툭 던진 듯한 시 한 수가 다가왔었다. 

‘계곡 물소리 문득 빗소리로 생각했는데(溪聲便誤 春雨聲)/ 맑은 태양이 번뇌 씻어주니 근심 사라지네(淸陽洗濯 風塵憂)/ 산새들이 웃음으로 마음을 전하니(山鳥傳心 微妙法)/ 산승은 자비로 그대를 쓰다듬네(山僧慈悲 施飮食)’ (‘산조전심(山鳥傳心)’ 전문)

고즈넉한 암자에 들어선 새들의 지저귐이 정겹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 청아한 새들의 노래에 108번뇌마저 단박에 털어내는 산승의 고결함도 엿보였다. 시 속의 ‘산승’은 계룡산 고왕암(古王庵)에 주석하고 있는 견진(見眞) 스님이다.

다섯 살 때부터 출가의 꿈을 키워갔더랬다. 친구들에게 틈만 나면 “보배로운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절로 가겠다”고 했을 정도다. 울진고등학교 2학년 때 천태종 봉화사 불교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포항에 보경사(寶鏡寺)라는 산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보배로운 거울(寶鏡)’을 ‘보배로운 경전(寶經)’으로 알고는 곧장 길을 떠나려 했다.

“어머니. 제가 집에 없으면 출가한 줄 아세요!”

매일 ‘반야심경’을 독송할 만큼 신심 돈독한 어머니였지만 아들의 출가만은 염려됐기에 이웃인 주구원(朱九源·전 교육자. 주호영 국회의원 부친)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구원 선생이 물었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출가한다면 어머님이 허락하겠다고 하신다. 졸업은 하고 가는 게 어떠냐?”
“예!”

1년 반이 지난 후 어머니와 마주했다. 아들의 의중을 간파한 어머니의 안색은 굳어 갔다. 아들은 조선 초기의 무장인 남이(南怡) 장군의 ‘북정시(北征詩)’를 꺼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닳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말라 없애리라.(豆滿江水飮馬無)/ 남아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後世難稱大丈夫)’
“어머니. 남이 장군은 나이 20세에 나라를 위해 여진족을 토벌했지만 저는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스님 생활 잘할 자신 있느냐?”
“자신 있습니다.”
“옛말에 출가해 스님 노릇 잘하면 7대가 흥하지만 잘못하면 9대가 망한다고 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음 날 새벽 3시 일어나 포항 보경사로 향했다. 은사는 벽암 동일(碧岩 東一·1924∼2005. 전 조계종 원로의원·신원사 조실) 스님과 맺어졌다. 

형편 어렵다고 절로 찾아온 사람이라도 만나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다. 기도하던 중 신도가 슬며시 건넨 봉투는 열어보지도 않고 보시함에 넣었다. 제자의 마음 씀씀이를 지켜본 벽암 스님은 “당장 원주를 맡겨도 된다”고 했다.

“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쌀, 간장, 김치 있으니 배고플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 부러워할 것 없던 견진 스님이었는데 사미계를 받기도 전에 만행을 떠났다.

“어머님이 일주문에 들어섰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1.8km 떨어진 문수암으로 냅다 달렸지요. 안도의 숨을 쉬고는 산길을 내려다보았는데 어머님이 암자로 올라오시는 겁니다. 저토록 찾는 걸 보면 사연이 있겠다 싶어 만났습니다.”

견진 스님 앞으로 나온 입대 영장을 전해주려 함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소원이 하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20년 가까이 천태종 신자로 살아왔으니 천태종으로 출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최종 선택은 저에게 있음을 확인시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소백산 구인사에서 머물렀다. 한 달 후 인연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지도를 구해 ‘큰 절’이라고 소문 난 곳을 모두 찾아 표시했습니다. 만행의 첫걸음은 계룡산에서 떼었습니다.”

바랑 안에는 벼루와 붓,그리고 ‘초발심자경문’ 한 권이 들어있었다. 동학사와 신원사를 거쳐 마곡사, 향천사, 수덕사, 관촉사, 선운사, 내장사 등을 지났다. 대중교통은 이용하지 않았다. 솔잎과 진달래로 허기를 메우며 산을 넘고 내를 건넜다. 절에 닿으면 허드렛일을 자청하며 머물렀고, 모자란 여비는 사하촌에서 논밭 일을 거들며 받은 품삯으로 충당했다. 여정은 길게 이어졌다.

“절이 좋아 출가했는데 뭐 하나가 빠진 듯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더욱 답답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질문을 모르니 답도 찾을 길이 없었다. 

대구 용연사에서 광덕(光德·1927∼1999. 전 불광사 회주)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 법석에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출가 전에도 품었던 질문이었다. 길목에 서서 광덕 스님을 기다렸다. 

“큰스님을 보자마자 ‘사람답게 바르게 살려면 어찌 살아야 합니까?’ 하고 여쭈니 즉답하셨습니다. ‘사람인(人) 변에 일찍 증(曾)이다. 스님(僧)이 되어라!’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미 저는 올곧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고는 길에서 절을 올렸습니다. 벼루, 여비 모두 용연사 법당에 내려놓고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절이 좋아 출가했을 뿐 왜 스님이 되려 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나 원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허전했을 터다. 그 빈 곳에 ‘불제자이자 인천의 사표’라는 자긍심을 채워 넣었다. 팔공산과 제약산을 넘어 영축산으로 향하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산딸기 하나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길 떠난 지 100일 만에 보경사에 도착했다. 그동안 딱 108개의 산사를 순례했고 66kg였던 몸무게는 46kg로 줄었다. 그해 사미계를 수지했다.(1982)
 

고왕암 전경.
고왕암 전경.

고왕암은 660년 백제 의자왕의 명으로 부설 거사의 아들 등운(登雲) 스님이 창건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략했을 때 왕자 융(隆)이 이곳에서 7년 동안 피신해 있다가 붙잡혔다. 백제의 옛 왕을 기억한다는 의미를 담아 고왕암(古王庵)으로 이름했다. 매년 10월 셋째 주 일요일 오전 10시 ‘백제 31대왕 추모문화대제’를 봉행한다. 절에서 조용히 지내던 추모제를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대제로 승화시킨 장본인이 견진 스님이다. 2006년 고왕암 주지를 맡은 직후부터 열어 왔으니 벌써 17년을 이어오고 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31명 역대 왕들의 넋을 위로합니다. 또한 국태민안과 남북통일의 염원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주석처에 노을빛이 깃들고 있다.
주석처에 노을빛이 깃들고 있다.

한 거사가 절에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땅콩을 새에게 주는데 1m 안으로 오지를 않았다. 거사가 집으로 돌아간 후 곤줄박이에게 먹이를 주며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새와 스님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새들이 어깨 위에 앉더니 나비들도 손등에 앉았다. 주석처로 들어와서는 차도 마시고 커피도 마신다. 

“쇠박새와 곤줄박이는 제 방을 차지하려 경쟁합니다. 반면 동고비는 신사적입니다. 제 방에 머물다 곤줄박이의 긴 부리에 맞아가며 쫓겨나고도 재 입방을 감행하지 않고 밖에서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견과류를 줄 때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저축성도 강해 문틈 사이에 먹이를 두곤 하는데, 곤줄박이와 쇠박새가 냉큼 물어 가도 개의치 않습니다.”

황세줄나비, 청띠제비나비, 홍점알락나비도 날아온다. ‘고왕암’이라서인지 왕나비, 대왕나비, 왕오색나비, 왕자팔랑나비 등 ‘왕’자가 든 나비가 유독 많이 들어선다. 꿀이라도 내어주면 이리저리 돌고 날개를 퍼덕이며 재롱을 떤다. 

다구에 앉은 왕오색나비.
다구에 앉은 왕오색나비.

“천년 된 느티나무를 유독 빠르게 도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나비인 듯 하나 호랑나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컸기에 새로도 짐작됐습니다.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합장을 한 채 ‘나비라면 내 곁에 한 번 와다오!’ 했습니다. 얼마 후 저 먼 곳에서 도량을 향해 곧장 날아와서는 부처손과 넉줄고사리, 꿩의비름을 심은 기왓장에 앉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청황적백흑의 다섯 가지 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감으로만 보던 왕오색나비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사향제비나비를 위한 기도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가사 위에 내려앉아 철야정진을 하고는 이튿날 아침 숨을 거둔 나비입니다.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고 싶었던 듯싶습니다. 그 서원 이뤄지기를 바라며 가사 위에서 입적에 든 사향제비나비 그대로를 계룡산자연사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이색적인 자연 교감은 SBS의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1126회)’, 다큐멘터리 ‘화첩기행’에도 소개되었다. 새와 나비는 먹이를 주기에 스님 곁을 찾는 것일까?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불성을 갖고 있기에 존귀합니다. ‘화엄경’에 따르면 바위 같은 무정물(無情物)에도 불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인간에게 예속된 환경으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자연 자체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중생과 자연은 한 몸이요 한 생명입니다.” 

견진 스님이 낸 ‘자비’를 새와 나비는 함부로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감지했을 터다. 그 답으로 스님 곁에서 노래하는가 하면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내내 날개를 퍼덕여 보였던 것이리라. 지게를 지지 않고는 먹을 것 하나 들일 수 없는 암자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건 꽃, 새, 나비와 소통하며 순진무구의 세상을 조성해 가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러고 보면 견진 스님은 ‘계룡산에서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넘어 나와 자연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견진 스님의 산문 시집.
견진 스님의 산문 시집.

“꽃의 미소는 땅에서 주는 아름다움이요, 나비의 춤은 천상에서 내려오는 항아의 몸짓이며, 산새들의 웃음은 우리에게 신비한 에너지를 일으키는 협연이 아닐까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의 글이 떠오른다. 

‘우울에 찬 사람에 있어서조차도,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을 고요히 유지하는 이에게는 절망적인 비애란 있을 수 없으리라. 자연은 순수하고 용감한 사람에게 결코 속된 슬픔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소로우의 노래’ 중)

견진 스님과 소로가 자연 속에서 체득한 깨달음은 그 맥이 같을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견진 스님은
계룡산 신원사에서 벽암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조계종 교육원 교육·연수국장, 한국문화연수원·템플스테이 사무국장, 조계종 15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산문 시집 ‘계룡산에서 자연을 노래하다’가 있다.

[1705호 / 2023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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