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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사서의 하룻밤

절 이름 한번 그럴듯하다. 망경산사(望景山寺). 멋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란 뜻일 터.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망경대산 기슭 해발 800m 고지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았다. 한때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날마다 북적이던 이름난 탄광촌이었다고 했다. 청량리역에서 두 시간 조금 넘게 그리고 다시 동네 택시로 40분을 더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 절 앞마당까지 이어지는 굽이굽이 고갯길은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이 났고, 숨이 찰 정도로 가팔랐다. 이름 모를 산야초들의 꽃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내년 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야생화가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낼까 싶어서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문득 짓궂은 생각 하나가 불쑥. 교회에만 오빠, 동생이 있으란 법이 있나. 조용한 산사에도 누나와 오빠와 여동생과 남동생들의 웃음소리가 풍경(風磬)을 달그락거리게 할 정도로 시끌벅적할 날을 상상해본다. 

이 절은 템플스테이를 주제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주지스님이 직접 설계한 알찬 프로그램으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템플스테이 명소다. 봄과 여름엔 200여 가지가 넘는 각종 산나물과 야생화를 감상하거나 채취하는 환희심을 선물하고, 가을과 겨울엔 전통 메주 만들기와 김장김치 담그기라는 특화된 소모임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갔을 때는 10월 초여서 그런 체험을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매달 두 번째 주말에 열리는 운탄고도(運炭高道) 트래킹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운탄고도는 영월·정선·태백·삼척 지역의 폐광지역을 잇는 평균 고도 546m, 총길이 173.2km의 둘레길 이름. 그중에서 망경산사 템플스테이가 운영하는 구간은 운탄고도 3번 길인 ‘광부의 길’이다. ‘망경산사-낙엽송 삼거리-모운동’으로 연결되는 약 6.5km의 옛길. 당시 석탄을 싣고 이 고갯길을 넘나들던 광부들의 걸쭉한 노랫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듯해 걷다가 뒤돌아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일행을 안내하던 주지스님은 군데군데 숨겨둔 포토존을 가리키며 꼭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하신다.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운탄고도 석탄 운반 길은 함께 걷고 싶은 명품 트래킹코스였다. 너무 가파르지도 않고, 너무 평탄하지도 않은 길. 운탄고도는 중도(中道)의 조건을 기막히게 충족하고 있다.

이곳 망경산사 템플스테이에서 얻을 수 있는 사찰에서 하룻밤의 참맛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망경산사에서 망경대산 꼭대기 방향으로 앙증맞은 암자 하나가 보였다. 만경사(萬頃寺)다.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닿는 제법 숨 가쁜 언덕길. 저녁공양 후에 산책하기 딱 좋은 거리였다. 아미타부처님과 33관음보살님을 모신 광장법당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글자 그대로 구불구불 물결치는 듯한 산자락의 모습이 일만 개의 밭이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암자의 이름이 훅하고 가슴에 와닿았다. 이랑 사이에 솟은 김을 매느라고 땀에 흠뻑 젖어있던 어머니의 삼베적삼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더더욱. 그날 저녁 만경사 주변은 추적이는 가을비와 뿌연 산안개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장면들로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이튿날 새벽 4시. 나지막하게 울리기 시작한 목탁 소리가 나의 혼미한 심신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무심코 쳐다본 영월의 새벽하늘은 얼마나 눈부시던지. 오랜만에 만나는 가을별들의 대잔치였다. 예불시간 내내 가족의 안녕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행복을 정성껏 빌었다. 새벽예불 울력도 했겠다, 아침공양은 더 없는 밥맛일 수밖에. 그렇게 산사에서의 1박2일이 가을바람처럼 지나갔다. 몸과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것일 듯. 여기에다 산사의 후한 인심은 또 어떻고. 주지스님은 촌사람인 내가 좋아하는 토속 된장과 고추장을 꾹꾹 눌러 담아 가방에 넣어주셨다. 순간 내 가슴엔 장독대 크기의 법열(法悅)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올가을 난생처음 겪는 마음의 질병 때문에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던 나에게 망경산사와 만경사에서의 하룻밤은 유난히 특별했다.

허남결 교수 hnk@dongguk.edu

[1706호 / 2023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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