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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인도순례

인도성지순례에서 마주한 부처님 흔적에 저절로 솟은 눈물

석가세존 성불하신 보리수·대보리정사 찾아 참배…첫 설법지도
인도 거주 친지 주선으로 인도 순례…바라나시·보드가야 등 찾아
LA ‘태고사’에 불서 5000여권 전달…사찰 내 불교도서관 생겨

이상규 변호사는 법보신문과 불광사에 고불서 모으기 캠페인을 제안해 약 5000권정도의 책을 미국 태고사에 보냈다.
이상규 변호사는 법보신문과 불광사에 고불서 모으기 캠페인을 제안해 약 5000권정도의 책을 미국 태고사에 보냈다.

영취산은 기사굴산의 별칭인데, 올라가 보니 바위산의 정상에 흡사 독수리를 닮은 듯한 큰 바위가 있었다. 너무나도 흡사해 저 바위에서 온 이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상은 집채덩이만한 바위 몇 개가 겹쳐 있었는데, 그 밑에 두, 세 사람이 들어가 앉을만한 암굴이 두 개 있었다. 위의 암굴에서는 사리불존자께서, 조금 아래의 암굴에서는 마하카샤파존자께서 각각 수행하셨다고 한다. 나는 그 속에 잠시 들어가 보았다. 그날의 산행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동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점심을 들고 약 30분 휴식을 가진 다음, 우리는 바로 보드가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당시만 해도 라지기르에서 보드가야까지의 도로는 도처에 파이고 홍수에 쓸려나간 자리를 개보수를 하지 않아 험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 하다.

우리 일행은 6시경이 되어서야 보드가야 외곽의 호텔에 들 수 있었다. 그 호텔도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건물이었다. 지정된 방으로 가서 행장을 풀고 세수를 한 다음 조금 쉬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위하여 식당으로 내려오라는 전화 기별이 왔다. 식당으로 내려가 일행들과 환담을 나눴다. 

그러던 중 밖에서부터 많은 사람의 소리가 들리면서 한떼의 단체여행객 같은 이들이 떠들썩하게 들어왔다. 약 30명쯤은 돼 보였다. 듣자니 말소리가 한국말이고, 어느 절의 신도들이 스님을 모시고 성지순례를 온 것 같았다. 나는 하도 시끄러워 우리 일행들과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에게도 민망해졌다. 조용히 그쪽으로 가서 스님에게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서울 길상사 신도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조반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석가세존께서 성불하신 곳을 향하여 떠났다. 나이렌자나강에서 나지막한 비탈길을 약 5분 올라가면 약간 나지막하게 된 곳의 보리수 밑에서 성불하신 것이다. 뒤에 아쇼카대왕이 석가세존의 성불을 기리는 네모난 거창한 첨탑을 그 보리수 앞에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이 대보리대정사(Maha bodhi maha Bihara)이다. 

안에 들어가 보니, 법당은 상, 하단으로 나뉘어 목책(木柵)으로 구획되었다.  목책 안의 상단에는 석가무니 부처님의 금불상이 모셔져 있고, 하단은 예불공간인 듯 몇 명의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 외에는 모두 티벳 승려들로, 그들은 독경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목책 안으로 들어가 가지고 간 향에 불을 붙여 세운 다음, 삼배를 올리고 내려왔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인 듯한 스님이 나에게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인도 돈 얼만가를 불전으로 내고 나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약 한 시간가량을 머문 다음, 바로 다음 목적지인 바라나시 근교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을 향하여 떠났다. 계속 이어진 평원을 달려 해가 질 무렵에야 바라나시의 외곽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에 도착했다. 약 8시간을 달린 셈이다. 

그곳에는 석존께서 성불하신 뒤, 과거 고행하실 때의 다섯 도반에게 첫 설법, 곧 초전법륜을 하신 곳에 세워진 웅장한 다메크 스투파를 비롯하여, 석존께서 머무셨다는 방과 수행자들의 거처 등 많은 유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의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이번 성지순례는 아쉽지만 이로써 당초의 예정대로 막을 내린 셈이다.

첫 순례의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나는 언젠가 시간이 나면 내자(內子)와 함께 인도의 4대성지를 제대로 순례하고져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드디어 2006년 2월에 이루어졌다. 인도에 있는 변호사인 친지가 믿을 만한 인도여행사를 주선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반을 마치자 우리는 서둘러 공항으로 나갔다. 순례의 첫 출발지인 바라나시  aranashi)행 비행기를 타기 위한 절차를 마쳤다. 

출국절차를 마치고 공항 라운지에서 숨을 돌리며 쉬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고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약 2시간 지연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비행기나 기차가 이정도 지연되는 것은 거의 상식에 통한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라나시를 향하여 떠났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자 우리는 바로 바라나시 힐톤을 찾아 체크인하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 후 잠깐 쉰 우리는 어둡기 전에 녹야원(鹿野苑) 참배를 다녀오려고 서둘러 호텔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인 보드가야까지는 바라나시로부터 약 9시간의 주행(走行)이 필요한 거리에 있다. 그것도 도중에  교통사고라던가 기타의 장해가 없이 순조로운 운행인 경우의 이야기다. 교통사고라도 있다면 시간은 마냥 늘어난다. 

다행히 우리는 대형버스가 아니고 소형 SUV를 타고 있었다. 때문에 기동력이 나은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약 8.5시간이 걸려 날이 어둑어둑 해서야 보드가야에 있는 닛고호텔에 체크인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간단한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은 다음, 약 10분정도를 쉬었다. 그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에는 이미 많은 순례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비구니와 수녀 그리고 원불교의 교무 등이 많이 있는 게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삼소회(三笑會)의 회원이라 했다. 종교의 벽을 넘어 서로의 성지순례에 동행하고, 교리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는 등으로, 종교간 친목과 협력을 도모하는 조직이라고 했다. 매우 인상적인 모임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이른 조반을 먹고, 바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에 아쇼카대왕이 세웠다는 대보리정사(Mahabody Mahavihara)에 들렸다. 부처님께 경배를 올리고 이어 대보리정사의 뒤에 있는 보리수에 예배를 올렸다. 

우리는 도량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당시의 부처님 모습을 연상했다. 눈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영취산을 찾아 오르는 일이다. 영취산은 마하가섭존자의 염화미소(岾花微笑)로 유명한 곳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갖가지 법문을 하신 매우 중요한 곳으로 지금은 그 정상을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집채만한 바위로 쌓인 정상 바로 밑에는 바위 사이에 반평쯤 되는 공간이 있어 위의 것은 샤리푸트라께서, 아래 것은 마하가샤파존자께서 각각 쓰셨다. 

여기서 무량 스님과의 인연도 소개하고자 한다. 무량 스님은 미국 예일대(Yale)를 졸업한 후 고 숭산 스님의 설법에 매료되어 초기에 한국으로 출가했다. 숭산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약 100여명에 달하는 외국 스님 가운데 한 분이며, 하버드 출신인 현각 스님보다 한참 앞선 분이다. 

그는 미국에 한국형 사찰을 건립할 생각으로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동쪽에 위치한 모하비사막 한복판에 우뚝 솟은 산이 하나있는 것을 떠올렸고, 그곳을 답사했다. 그 결과, 거기에 있는 바위산은 옛적에 모하비족이 제(祭)를 올렸던 성스러운 곳임을 알고 숭산 스님과 상의 끝에 그 땅을 구입했다. 스스로 기중기를 운전하며 터를 다듬고 한국식 절을 지어 단청까지 하여 깔끔하게 법당과 관음전을  지었다. 관음전의 지하층을 요사채 겸 도서실로 꾸미기까지 하였다(무량 스님 수행기, 산다는 것은? 1, 2권 참조). 

하루는 미국에 있는 무량 스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절 입구에 일주문을 세웠는데, 현판을 달아야 하니 ‘도봉산 태고사’(道峰山 太古寺)라는 현판글씨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필자의 선고께서 서예에 능하셨기 때문에 부탁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시고 써 주셨다. 

시기도 딱 맞아 떨어졌다. 마침, 2004년 10월 초에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IPBA가을 이사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때문에 가는 길에 어차피 LA를 거처야 했다. 그 기회에 무량 스님의 모하비사막 태고사에 들리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LA공항으로부터 차로 약 2시간 남짓 걸린다니, 그다지 먼 곳을 아니었다. 

칠레에 가는 길에 LA 공항에 내렸더니 무량스님이 픽업트럭을 가지고 일부러 마중을 나와 주었다. 우리는 그 차편으로 태고사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모하비사막을 한참 달리니 사막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했다. 죠슈와(josshua) 나무만이 여기저기에 우뚝 우뚝 서 있어 오히려 사막의 초라함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막의 한 복판에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고, 커다란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묘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문을 지나자, 마치 한국의 유서 깊은 절의 도량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차에서 내린 뒤 도량을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중형 불도져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스님께서 설명하기를 저 불도저는 자기가 이 도량과 법당의 기초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쓴 도구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것도 이제 돌려줄 때가 가까워 온 것 같다고 했다. 

도량의 입구 가까이에 한국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각(鐘閣)이있고 거기에는 잘 주조된 한국의 범종(梵鐘)이 걸려 있었다. 스님은 한국의 범종소리가 하도 좋아 그에 매료되어 운반에 많은 비용이 소요됨에도 한국에서 범종을 주조하여 멀리 배로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가져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관음전에서 저녁공양을 마치고, 우리는 관음전 지하에 마련된 요사채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했다. 침실 옆에는 널찍한 독서실까지 마련되어 있었으나, 거의 빈 방이었다. 한인포교를 위해 나는 귀국하는대로 고불서(古佛書)모으기 캠페인을 전개하여 책을 모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귀국하자마자 불광사 및 법보신문에  고불서 모으기 캠페인을 제안했다.  이들은 흔쾌히 동의했고, 고불서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시작과 함께 의외로 많은 책이 모였고 반년 만에 약 5000권의 책을 모을 수 있었다. 도서발송 비용 일체는 내가 부담했고 100박스 분량을 보냄으로써 태고사는 훌륭한 불교도서실을 깆추게 되었다.

무량 스님은 태고사를 조계종에 헌정하고, 지금은 하와이주에서 가장 큰 섬인 하와이섬의 힐로(Hillo)에 선원(禪院)을 차리고 선승(禪僧)생활을 하고 계신다.

변호사, 전 고려대 교수

[1706호 / 2023년 1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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