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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5)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1)

의상 스님을 둘러싼 아미타신앙·관음신앙 논거들은 근거가 희박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따르면 의상은 장엄한 사찰 관심 없어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관음신앙 유일 언급 
낙산사 창건 과정에 원효, 범일도 등장…종합적인 분석이 필요

양양 낙산사의 홍예문. 낙산사는 의상의 관음신앙을 상징하는 사찰이지만 원천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법보신문DB]
양양 낙산사의 홍예문. 낙산사는 의상의 관음신앙을 상징하는 사찰이지만 원천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법보신문DB]

의상은 당의 지엄으로부터 전수해 온 화엄학의 연구와 홍포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670년 귀국 초에는 왕경의 황복사, 그리고 676년 부석사를 창건한 이후에는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을 무대로 화엄학 전교와 제자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교학불교의 주류인 화엄종 개조로서 길이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석사를 창건하면서 아미타신앙을 구현하는 가람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아미타신앙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전승되었고, 동해 낙산에 관음 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을 정착시킴으로써 관음신앙의 확산에도 기여한 인물로 신봉되어 낙산에서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를 성립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의상의 화엄교학 내용은 그의 ‘일승법계도’가 법손들에 의해 대를 이어 끊임없이 연구되었고, 다양한 주석서를 남김으로써 의상의 교학 내용과 후대에 미친 영향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의상의 아미타신앙이나 관음신앙 같은 불교신앙에 대해 의상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와 ‘송고승전 의상전’ 등에서 언급이 없고, 오직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만 관음신앙만을 유일하게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특히 ‘송고승전 의상전’에서는 의상의 근엄 성실한 수행 자세와 제자 양성에 주력하는 모습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전장과 노복을 시주하겠다는 문무왕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탁발로 생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내용,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널리 펼칠 때,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서,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서 강의하니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오는 자가 많았다”거나 “이때부터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는데, 마음에 들어서 지팡이를 세워놓고 머물면 배우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진을 쳤다”고 한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의상은 애초 장엄한 사찰의 건축이나 농장 경영 같은 문제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아미타신앙을 구현하는 가람구조는 고려시대 이후, 좁혀서는 고려전기 왕사와 국사를 역임한 결응(964~1053)에 의해 중창될 때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의상의 아미타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또한 의상의 관음신앙에 대한 자료로서는 앞에서 지적한 ‘삼국유사’의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 이외에 의상이 낙산의 관음굴에서 관음진신을 친견하고자 예배 발원하면서 지었다는 ‘백화도량발원문’이 특히 주목을 받아왔으나, 이 ‘백화도량발원문’과 함께 ‘일승발원문’ ‘서방가’ ‘투사례’ 등 의상의 찬술로 전해지는 4편의 발원문과 게송류의 글들이 모두 의상에게 가탁한 후대의 작품들임이 확실시됨으로써 의상의 아미타신앙뿐만 아니라 관음신앙도 원천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의상의 관음신앙에 대한 자료로서 가장 주목받은 자료는 ‘삼국유사’의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인데, 의상과 원효의 관음보살 친견의 설화뿐만 아니라 범일의 정취보살 조성의 설화, 그리고 고려시대 낙산사 보주의 행방, 조신의 꿈 설화 등 복잡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을 소개하고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문단의 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임)

① 옛날 의상이 비로소 당에서 돌아와서 관음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고 듣고, 낙산이라고 이름하였다. 대개 서역의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은 소백화(小白華)라고 한다. 곧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어 이름하였던 것이다. (의상이) 재계한 지 7일째에 좌구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8부의 시종이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해 참례하니, 수정염주 한 꿰미를 내어 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 나왔다. 동해의 용도 또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굴을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원만한 얼굴과 고운 자태는 엄연히 하늘이 낸 듯하였다. 그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다. 그제야 이곳이 (관음) 진신의 주처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절 이름을 낙산이라고 하고, 의상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② 뒤에 원효가 이곳에 와서 (관음 진신을) 보고 예를 올리려고 했다. 처음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다. 여인도 장난조로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원효가) 또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개짐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마실 물을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원효는 이를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기를, “제호(醍醐)화상은 그만두시오”라고 하고는 홀연히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니, 관음상의 자리 아래에 먼저 본 신발의 나머지 한 짝이 있었으므로 그제서야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했다. 원효가 성굴(聖崛)에 들어가서 진신을 보려고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그만 떠났다. 

③ 그 뒤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 연간에 당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는데,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사미가 무리 가운데 말석에 앉았다가 말하기를, “저 역시 고향 사람입니다. 집이 명주의 경계인 익현령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법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절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범일은) 여러 사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받고, 회창 7년 정묘(847)에 본국으로 돌아와 먼저 굴산사를 개창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15일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사미가 창 아래에 와서 말하기를, “예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법사에게 약조를 드려 승낙을 받았었는데, 어찌 그리 늦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범일은 놀라 꿈에서 깨어나 수십 인을 데리고 익령현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어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하였다. 그 여인에게는 여덟 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늘 마을 남쪽 돌다리 아래에 나가 놀곤 했다. 하루는 그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와 함께 노는 아이 가운데 몸에서 금빛 나는 아이가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범일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범일은 놀라고 기뻐하여 아이와 함께 놀던 다리 밑을 찾아보았다.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어서 꺼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예전에 보았던 사미와 같았는데, 이는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상이었다. 이에 점치는 괘쪽(簡子)을 만들어 절 지을 자리를 점쳐보니 낙산의 위쪽이 좋다고 하므로 그곳에 3칸의 불전을 짓고 그 보살상을 모셨다.

④ 백여 년 뒤에 들불이 일어나 이 산까지 번졌는데, 오직 두 성전만이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서산의 큰 전쟁(몽골의 침입)이 일어난 이후 계축년과 갑인년 사이(1253~ 1254)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몽골의 군사가 갑자기 공격해 와서 성이 함락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주지 선사 아행(阿行)이 두 보주를 은합에 넣어 몸에 지니고 도망하려고 하니, 절의 노비인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 깊이 묻고 맹세하기를, “내가 만약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보주도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고,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고 하였다. 갑인년(1254) 10월22일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여 적병이 물러간 뒤 두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의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 이녹수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서 감창고 안에 보관하고 교대할 때마다 전해주었다. 무오년(1258) 11월에 이르러 본업(조계종)의 원로인 기림사의 주지 대선사 각유(覺猷)가 왕께 아뢰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나라의 신령스러운 보물인데,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안에 묻어 두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의 창고 안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제 명주성도 위태하여 지킬 수 없으니, 어부(御府)에 옮겨 보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고 야별초 10명을 시켜 걸승을 데리고 가서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가져다가 내부(內府)에 모셔두게 하고, 사신 10명에게 각각 은 1근과 쌀 5섬을 내렸다.

⑤ 옛날 신라시대에 세달사의 장사(莊舍)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 승려 조신을 보내 장사를 관리케 하였다. 조신이 장사에 와 있을 때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다. 몇 년 뒤 김흔의 딸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불당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다가 지쳐 어느 사이에 깜빡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김흔의 딸과 맺은 인연 설화는 생략함)

이상이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내용을 5개 문단으로 나누어 인용한 것인데, 이렇게 장황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우선 자료 내용 전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구조적인 이해를 추구하지 않고, 선택적이고 편의적으로 자료에 접근하는 현재 불교사학계의 방법상의 모순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다. 또한 의상이 낙산의 관음굴에서 관음 진신을 친견하고자 예배 발원하면서 지었다는 ‘백화도량발원문’이 의상의 진찬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의상의 사후 빨라도 8세기말 이후에 이루어진 글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발원문의 내용이 의상과 그를 계승한 문도들의 신앙 경향을 충실하게 나타내주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현재 불교사학계의 안이한 연구 자세에 대해 반성하고 비판하려는 의도에서다.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서술한 낙산사의 연혁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복잡한 사건이 전개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낙산사의 창건과정에는 7세기 후반 화엄종을 창립한 의상뿐 아니라 그와 평생 도반 관계였던 원효, 9세기 후반 선종 9산의 사굴산파를 개창한 범일 등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앙 대상으로서 관음보살상과 함께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두 불전이 고려전기까지 유지되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13세기 중반 몽골 침략을 전후하여서는 두 보살상보다도 관음보살과 동해 용으로부터 각각 받았다는 두 보주가 국가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앞서 9세기 중반에는 의상의 직계 법손들에 의해 개창된 세달사의 영향이 낙산사 인근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점 등 실로 다양한 인물들과 복잡한 사실을 전해주는 자료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데, 구체적인 분석은 다음 호로 이어질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07호 / 2023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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