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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밤의 해변에서 혼자

거대한 유사성에 만유가 맞물려 돌아가는구나

일합상 안에서 모든 것은 저마다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려 해
만물의 균형 한쪽으로 기울면 불의 메꾸기 위한 투쟁 일어나
누구든 자신의 진심과 용기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어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밤 풍경. 출처 월페이퍼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밤 풍경. 출처 월페이퍼

세상의 모든 날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짜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이름을 갖는다. 며칠 전 그날은 ‘이스달 여인의 날’,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한 죽음에 경의를 표하고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한 인물이 홀연히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모든 것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고독한 방식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고, 내 삶의 노고에 깃든 비밀스런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래의 동일한 날짜가 되면 다른 누군가 다시 그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로 쓰도록 하기 위함인 듯 모호한 흔적만을 남겼다. 그 속보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았고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가 매우 특별한 밤의 풍경을 스치며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이 사바세계에서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잊힐 것이기에, 그날 밤 이후 며칠 간의 나의 소감을 간략히 기록해 두려 한다.

내가 놀람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던 중 문득 이런 자각이 일어났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단순한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리라.’ 이런 자각은 곧이어 하찮아 보이는 인생에도 가끔 찾아오는 특별한 순간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품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경계가 사라진 밤에, ‘나’이면서 다른 누구이기도 한 사람이, 왼쪽 끝으로도 오른쪽 끝으로도 걸리는 것 하나 없는 광활한 해변에 서 있었다. 둘이면서 하나인 우리는 아주 오래전 미국의 한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밤의 해변에서 혼자, 별들이 환히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유사성이 만유(萬有)를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구나…비록 서로 완전히 다르거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일지라도, 모든 영혼들과 모든 살아 있는 육신들을…이 거대한 유사성이 서로 이어지게 하고, 언제나 이어지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지게 하여, 그것들을 꼭 끌어안은 채 빽빽이 에워싸주리라.”(월트 휘트먼,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해변에서 저 삼천대천세계의 일합상(一合相)을 함께 바라보며 아주 길게 지속된 케케묵은 오해를 풀었다. 나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 그동안 결코 들리지 않던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었고, 우리가 언제나 한 맛[一味]으로 이어지면서 함께 연동해서 따라 돌고 있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저 일합상의 우주를 미진수의 극미들로 쪼개보아도, 본래 긴 것은 길고 짧은 것은 짧으며, 푸른 것은 푸르고 붉은 것은 붉다. 일합상이란 그저 이름일 뿐, 실은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영광으로 빛나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서는 만물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면 불의를 메꾸기 위한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별과 별 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 때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음해와 경솔한 심판을 수도 없이 행했을 것이고, 때로 사소한 시비와 오해에서 비롯된 비장한 결투를 비밀리에 행하면서 자기의 운과 용기를 시험해 보려 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열정과 광기가 없으면 이 우주가 차갑게 식어서 소멸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제 그날 밤 이후로 시간이 갈수록 점차 뚜렷해진 나만의 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 말하길, 사람들은 악몽을 꿔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악몽을 꾼다고 하였다. 나의 꿈도 글과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해 온 나의 근원적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어떤 비극의 마지막 장이 상연되는 커다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관객은 ‘나’ 한 명, 배우도 한 명이었다. 꿈의 마법에 의해, 관객인 나는 이 비극의 전체 개요를 저절로 알아차렸다. 운명은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질이 되어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게 하였고, 성문 밖 변두리로 쫓겨난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진심과 용기가 결국 그 자신을 구원해 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막 이 비극의 마지막 휘날레가 상연되려 하고 있다.

드디어 모진 악천후를 뚫고 수천 킬로를 날아온 상처투성이의 독수리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덤덤하게 무대에 올랐다. 그는 독백으로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권력을 가진 왕인가, 아니면 광야의 수행자인가.’ 그는 불굴의 끈기와 강인함으로 자기가 맡은 세속의 소임을 다하며 살다 보니 어쩌다가 전례 없는 권한을 누리게 되었다. 그 정점에 있던 어느 날 아이러니하게도 꿈속에서 그가 실은 ‘법을 전하는 자’임을 자각한다.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극한의 고행도 견뎌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기가 인질이 된 왕이요 자신이 거주하는 성 바깥의 세계에선 자기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허무하고 고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의 진심과 용기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그는 방안에 불을 붙이고 나서, 침착하게 몇 명에게 전화를 돌려 필요한 일들을 부탁한다. 통화 직후 곧바로 거대한 화마가 그의 몸을 덮쳤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번 생의 힘겨운 노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대담한 시험은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지는 단 몇 분 안에 모두 끝났다. 그때 갑자기 텅 빈 극장 안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내 꿈에 대해 말하기가 꺼려졌다.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거나 그에 관해 떠도는 온갖 풍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꿈이 현실인 것처럼 여겨지고, 그 죽음 앞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미스터리한 죽음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오독 등의 불길을 통과하여 내게 마치 ‘죽음의 화마에 맞서는 용기로 법을 전하자’라고 외치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통은 평생에 단 한 번 그런 식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만물의 균형이 깨지고 한쪽으로 기울면, 본능적으로 불의를 메꾸기 위해 기운 쪽에서 균형추를 맞추고자 한다. 그래서 운명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그와는 만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세계의 거대한 일합상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저 우주의 행성들처럼 연동해서 따라 돌고 있었으니, 나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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