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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동만물상-성영희

기자명 동명 스님

만물트럭이 만드는 정겨운 풍경

적막한 시골 찾은 만물상 트럭
반갑게 맞이하는 건 온통 노인
소박하고 넉넉한 장면 보여줘
만물상 트럭도 점차 사라질 듯

한적한 마을에 만물트럭이 지나간다
늙수그레한 남자와 동승한 여자 목소리는
옆자리에 앉지도 않고
평생 늙지도 않는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만으로도 설레는
바깥노인들

아이가 없는 집에서 우유를 사고
남편이 없는 집에서 국수를 산다
사탕 한 봉지를 사는 할머니는
일주일 동안 입안을 굴리며 말 상대를 대신할 것이다
마시멜로는 손주들의
달콤한 말맛이어서 좋고
잇몸의 사정을 잘 헤아리는 두부는
무를수록 부드러워서 좋다
사탕은 평생을 통틀어
가장 달달한 대답 같다

늙은 마을에
어린 입맛들

농번기에는 모두 흙 묻은 손이다
트럭이 돌아 나가는 저녁처럼 어둑한 손끝들
외상은 몇 달이 지나도
이자를 늘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2주째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거슬러 주지 못한
잔돈 같은 소식들

이 마을에서
묻지 말아야 할 안부도 있다
(성영희 시집, ‘귀로 산다’, 실천문학사, 2019)

요즘 웬만한 시골 마을에는 젊은 사람이 없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노인들이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외지 차 한 대만 와도 반가운 법인데, 특히 반가운 차가 만물상 트럭이다.

옛날 서커스 차량이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하듯이, 이동만물상 트럭은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로 온다. 차에는 분명 늙수그레한 남자 혼자 타고 있는데, 확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꾀꼬리 같은 젊은 여자 목소리이다. 젊은 목소리가 그리운 늙은 마을 사람들이 죄다 나와 트럭 주위에 도열한다. 아무리 보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없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사람은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또는 적어도 한 가지의 물건을 고른다. 노인들이 고르는 물건이 재미있다. 아이도 없는데 우유를 집어들고, 남편도 없는데 국수를 바구니에 넣고, 손주도 없는데 사탕을 찾는다. 아이처럼 우유라도 마시고, 남편이 없으니 남편이 좋아하던 국수라도 삶아서 위안을 삼고, 손주가 없으니 사탕이라도 사서 손주처럼 오물거리면 약간의 수심은 한결 괜찮아진다. 가만 보면 늙은이들이 오히려 입맛은 어리다. 신용카드 사용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곳에서는 외상이 없어진 지 오래건만 이동만물상은 외상도 환영이다. 몇 달이 지나도 이자를 받지 않는다. 가난하면서도 참 넉넉한, 그야말로 없는 것 없는 만물상, 없어도 없다고 탓하지 않는 참 편리하고 착한 이동만물상이다.

그런데, 2주째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더 이상 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 않는다. 어차피 어디로 갔는지 모두들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만물상은 대형 마트거나 인터넷 쇼핑몰이다. 그러나 그곳은 시골 마을을 다녀가는 이동만물상 같은 넉넉하면서도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골 마을에 살지 않는다면, 이동만물상이 만드는 이와 같은 풍경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마 시인은 늙은이들만 사는 시골 마을에 살고 있나 보다. 그나마 지금은 노인들이라도 있어서 이동만물상이 오는 시간은 한바탕 잔치가 된다. 그 시간만큼은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인다. 한바탕 흥성거렸던 마을은 이동만물상 트럭이 떠나면 다시 ‘초용’해진다. 마을 사람들의 평균연령은 75세, 10년 후에도 이동만물상이 올까? 이동만물상도 오지 않는 그야말로 ‘최용한’ 마을 아닌 마을이 될지도 모르겠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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