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성산 원각사 주지 반산 스님

“갈등·반목의 시대 차별 줄이고 행복의 길 열어 줄 경전은 화엄경”

대학 낙방 후 ‘방황’
용산역서 사고로 입원

“발목 절단해야 한다”
난생 처음 간절 기도

3개월 치료 완치 퇴원
부처님, 사무치게 궁금

‘적멸보궁’ 광고 보고
명정 스님 은사로 출가

부처님 은혜 보답하려
‘화엄경소초’ 완역 원력

종범·무비·월운 스님 지도
24년 적공들여 34권 출간

화엄 명구 만나 사유하면
“나를 위해 설하셨구나!”

사경 하며 간절 기도
부처님 가피 분명 내려

원각사 주지 반산 스님은 “경전 읽는 묘미를 느낀다면 사경해 보기를 권한다”며 “읽고 쓰고 기도하다 보면 분명 가피가 내릴 것”이라고 전했다.사진=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았을 때의 경계를 설파하고, 그 경지(법계·法界)에 도달하는 이론과 방법을 전하는 경전이 있다. 대승불교 교리의 정수요, 정점이라는 이 경전은 워낙 방대하고 심오해 ‘화엄대해(華嚴大海)’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서양의 철학에서 사유해 온 물음에 답을 보여준다는 경전, ‘화엄경’이다. 

‘화엄경’ 해석의 최고봉으로는 중국 당나라의 청량 징관(淸涼 澄觀·738~839) 스님이 지은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를 꼽는다. 중국의 화엄사상이 ‘불교사상의 극치’라고 평가받는데 일조한 주석서다. 우리나라 전통 강원(지방승가대학)의 대교과(大敎科·봉은사 소장 목판본) 교재로 쓰일 정도로 한국 불교학계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럼에도 이 소초를 온전히 번역한 책은 없었다. 하여 스승과 제자가 한자리에 앉아 소초의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며 ‘청량 징관의 화엄 세계’를 엿보았다. 

‘화엄경청량소(華嚴經淸涼䟽)’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완역·완간된 건 2020년이다. 전 쌍계사 강주이자 천성산(千聖山) 원각사(圓覺寺) 주지 서봉 반산(瑞峯 盤山) 스님이 20여년의 세월 동안 적공(積功)을 들여 번역했다. 정확히 설명하면 ‘화엄경’에 해석과 주석을 단 소와 초가 합해진 ‘화엄경수소연의초’(봉은사 소장 목판본)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나름 ‘공부 좀 하는 학생’이라는 평을 들어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내심 판검사를 염두에 두었더랬다. 그런데 물리·화학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더니 함수·확률·미적분이 전체 시험 평균 점수를 깎아내렸다. 가정 형편상 국립대 전 학년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대학 예비고사부터 통과하지 못했다. 

칼바람 몰아치는 12월 서울로 올라왔다. 낙심과 우울은 때론 시야를 흐리게 하고 급기야 경계심마저 떨어뜨린다고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용산역 철로에 왼쪽 신발이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데 서행하던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발목·발등 주변의 뼈가 으스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용산철도병원에 누워 있었다.(1978) 

의사는 “발목을 잘라야 한다”고 했다. 병원으로 달려 온 어머니에게 ‘살길’을 물었다.

“의사가 포기했는데 별도리 없다. 부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태어나 처음으로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발등의 살이 ‘꿈틀’하는가 싶더니 ‘새 살’이 오르는 듯했다. 이를 지켜본 의사는 “발을 자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저는 드레싱(dressing)만 해 드렸습니다. 무엇을 더 하셨습니까?”
“부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적입니다. 저도 무슨 일을 하다 안 되면 기도해야겠습니다.”
3개월 치료 후 퇴원했다.
‘부처님은 어떤 성자이시기에 잘라야 할 발을 낫게 해 주시나!’

사무치게 궁금했다. 대구 반월동에 자리한 불교서점으로 달려가서는 ‘석가여래일대기’(김대은 저) ‘불교성전’(동국역경원)을 품에 안았다. 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며 인연이란 정말 묘했다. 그리고 출가는 구속이 아닌 자유를 향한 걸음이었다. 1년여 후 통도사 고원 명정(古園 明正·1943∼2019)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1980) 

해인사 강원·은해사승가대학원을 졸업한 후 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쌍계사 강주 등을 맡아 후학을 양성했다. 2004년 부산 토곡에 영축선원을 개원해 도심 포교에 매진한 반산 스님은 2009년부터 양산 천성산 원각사 주지를 맡으며 불자들에게 법을 전하고 있다.
 

반산 스님(사진 왼쪽)은 경봉 스님을 시봉했다. 

극락암에 주석하고 있던 경봉 스님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들었기에 통도사 산문을 열었던 것일까.

“출가해 스님이 되면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약에 대한 지식도 쌓을 겸 경북 영주에 있는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12·12사태가 발생했던 1979년 일간스포츠에 게재된 통도사 광고를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이라는 문구에 ‘확’ 꽂혔습니다.”

영주에서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집에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출가를 허락할 리 없으니 부모님은 아예 찾아뵙지도 않았습니다.”

대구에서 다시 양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7남매 중 막내가 가사를 수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건 한참 후다. 

출가할 때면 큰 절에 머물다 암자로 가는데 희유하게도 통도사가 아닌 극락암으로 직행했다.
“큰절 행자실로 가려는 데 지안 스님 법문 들으러 오셨다는 보살님 한 분이 ‘왜 출가하시는가?’ 물어요. ‘도(道) 깨치러 왔습니다’ 하니 ‘당당하십니다’라고 해요. 그러더니 ‘극락암에 큰 도인 계십니다’라며 앞장서기에 무작정 따라갔습니다. 처음 들어선 암자임에도 오랫동안 살았던 집처럼 정겨웠습니다. 밥하고 나무하는 데도 힘들거나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해인사의 퇴옹 성철(性徹 退翁·1912∼1993), 송광사의 구산 수련(九山 秀蓮·1909 ~1983) 스님과 함께 당대 내로라하는 선지식 경봉 정석(鏡峰 靖錫·1892-1982) 스님을 시봉한 건 큰 복일 터였다. 

“‘인천 사표’의 상징 같은 스님이셨습니다. 참으로 인자하셨습니다. 불자들을 위한 법문이 일품이었는데 불교의 진수를 일상의 언어로 쉽게 잘 풀어 주셨습니다. 노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불교를 다 통찰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눈 푸른 납자들을 제접할 때는 냉정하고도 명료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노 스님을 모시며 늘 ‘내가 출가하기를 잘했구나!’ 했습니다.”
 

은해사승가대학원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며 ‘화엄경소초’ 번역 원력을 세웠다.(1996) 그 연유가 궁금했는데 의외로 간단했다.

“절망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려 시작했습니다.”

반산 스님의 ‘화엄경’을 향한 열정은 놀랍다. 서울 길음동 승현사에서 ‘부전 스님’으로 머물 때다. 당시 종범(전 중앙승가대 총장)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 경전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반산 스님도 경청했다. 3년 10개월 동안 ‘금강경’과 ‘법화경’을 공부했고 ‘화엄경’을 공부하던 중 떠나게 됐다.

“그 뒤로도 2년을 더 강의하셨습니다. 명강의를 놓칠 수 없어 녹음 테이프를 구해 저만의 진도를 나갔습니다.”

쌍계사에서 덕민(불국사 승가대학장) 스님이 ‘화엄경청량소’를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1993) 부득이 6개월 만에 중단됐지만 반산 스님은 산사에 남아 공부하다 의문이 생기면 덕민 스님을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은해사승가대학 1기로 입학에서는 무비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들었다.(1996) 이때 한자로 된 청량 징관의 ‘소초’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1996)

“‘80 화엄경’을 기준으로 보면 경을 해석한 소는 60권이고, 다시 소를 풀이한 초가 90권에 이릅니다. 엄청난 분량입니다. 하루 10시간씩 꼬박 1년 동안 컴퓨터 입력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망막에 혈흔이 생기고 모기나 지렁이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비문증(飛文症)도 생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8년 ‘화엄경청량소’의 서품에 해당하는 ‘세주묘엄품’을 번역해 출간했다. 

봉선사에서는 월운 스님으로부터 ‘서봉(瑞峰)’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전강 제자가 되었다. 
 

2002년 음력 10월10일 전강·건당식 장면. 
2002년 음력 10월10일 전강·건당식 장면. 

“컴퓨터 입력 작업을 마치고 창녕의 한 암자에서 혼자 ‘십지품’ 번역에 착수했는데 얼마 못 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엄청난 사상과 수행체계가 담겨 있는 ‘십지품’을 혼자 완역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나아갈수록 산은 더 높고 오르기는 버거웠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려면 ‘구사8년·유식3년’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구사론과 유식에도 정통한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능엄학림에서 ‘십지품’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덕민 스님에게 물었듯,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월운 스님에게 물을 요량으로 봉선사 산문을 열었다. 반산 스님은 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소임을 보며 그 어렵다는 ‘화엄경청량소’의 ‘십지품’을 완역해 출간했다.(2003) 

“1차 번역을 마치고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을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 풀장을 풍덩 뛰어들었다가 엄청나게 허우적거렸습니다. 깊이가 2m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십년감수했습니다. 그 순간 ‘경학(經學)의 깊음을 모르고 겁 없이 십지품에 뛰어들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작심했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책은 내고 간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엄경소초'를 완역·완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엄경소초'를 완역·완간 했다. 

‘화엄경소초’완역 원력 24년만인 2020년 전34권을 출간했다. 그해 11월 통도사 극락암에서 출판·봉정 법회를 봉행했는데 덕민 스님이 전한 일언은 이 책의 가치를 증명했다.

“화엄의 세계는 심오하기에 청량 국사의 주석서 같은 어른 스님들의 해설이 없다면 20~30년 경전을 들여다보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결국 깨닫지 못한 채 문자법사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수십 년 동안 고생하며 끈질기게 정진해서 오늘 이 봉정식을 올리는 반산 스님을 보니 노스님과 은사 스님께 보은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제2, 제3의 반산 스님 같은 학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갈등과 반목의 시대에 ‘화엄경’은 어떤 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화엄경’은 자신이 부처임을 알고 부처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 줍니다. ‘나 그대로’ 완전한 부처임을 깨달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행복에 이르는 길을 모든 행간에서 보여줍니다. 이 경전의 핵심 중 하나는 나와 너, 나와 자연은 모두 동등하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적어도 부와 명예, 직위를 앞세운 차별은 줄어들 겁니다.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이 꽤 많습니다. 일단 경전을 열어보겠다는 마음을 내는 게 중요합니다. 어떤 구절을 만나서는 ‘나를 위해 설하셨구나!’ 하기도 합니다. 읽는 묘미를 느낀다면 써 보기를 권합니다. 사경을 통해 얻는 환희는 또 남다릅니다. 읽고 쓰며 ‘기도’하세요. 분명 가피가 내릴 겁니다.” 

수많은 명구 중 하나를 청했다.

“‘어떤 사람이 모든 부처님을 알려면(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응당히 관하라. 이 세상 모든 일은 마음이 지은 것이니라.(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남의 것을 훔치려는 마음을 내면 도둑이고, 자비를 베풀려 하면 부처입니다. 어떤 세상을 조성할지는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천성산 원각사 전경. 

반산 스님은 오늘도 불자들에게 ‘화엄 명구’를 전하며 그 속에 농축된 교리와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이 땅에 좀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 위함일 터다. ‘반산의 화엄 세상’이 ‘부처님 세상’일 터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반산 스님은
서봉 반산 스님은 1980년 고원 명정(古園 明正)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1984)한 후 천은사 선원 등 6하안거를 성만했고, 중앙승가대학(1990년), 은해사승가대학원(1999)을 졸업했다. 통도사 · 해인사 강사, 쌍계사 승가대학 학장(2014-2016) 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봉선사 교무국장,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 행자교육원 교수사를 역임(2001-2003년) 했다. 부산 영축선원장, 화명선원장에 이어 현재 양산 천성산 원각사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재미있는 금강경》, 《재미있는 법화경》, 《재미있는 화엄경》(도서출판 부다가야 간), 《화엄경청량소》 전35권(2018-2020년, 도서출판 담앤북스 간) 등이 있다.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