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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6)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2)

의상의 낙산사 설화는 화엄종이 관음신앙 받아들인 의상 사후 등장

창건 과정에 여러 인물 등장…의상만 발췌한 해석은 모순·한계 불러와
고본에 따르면 범일 사적은 앞에 있고 의상과 원효 사적은 뒤에 서술
정취보살 먼저 있었고 뒤에 관음상 봉안하며 의상과 원효 설화 탄생

낙산사 홍련암 관음굴 입구 전경. [법보신문DB]
낙산사 홍련암 관음굴 입구 전경. [법보신문DB]

의상의 관음신앙 이해에서는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가 일찍부터 기본사료로 활용되었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는 조목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낙산사 창건과정에서 의상뿐 아니라 원효와 범일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관음보살과 함께 정취보살이 같이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고려 후기 몽골 침략 과정에서 관음신앙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의상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의 부분만 발취해 해석하는 종래의 편의적 접근방법으로는 의상의 관음신앙 진실과 이후의 변화 과정, 낙산사 연혁의 체계적 이해에 모순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회에서는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이 조목의 전문을 내용별로 문단을 나누어 인용하였는데, 본회에서는 문단 순서에 따라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낙산사의 연혁과 관음신앙의 전승 과정을 추적해보려 한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첫째 문단은 의상이 낙산 해변의 굴속에 관음 진신이 상주한다는 말을 듣고 7일 동안 재계한 뒤 용천8부신중의 인도로 굴속에 들어가 참례하고 공중으로부터 수정염주 한 벌, 동해의 용으로부터 여의주 한 개를 받아서 나왔으며, 다시 7일 동안 재계한 뒤 진신을 친견하고 계시를 받아 산꼭대기 쌍죽이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음보살의 소조상을 조성하고, 얻은 두 구슬을 성전에 남겨두고 떠났다는 것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그 이후 낙산사와 의상, 그 문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 없이 일회성으로 끝난 사건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화엄학의 전수와 제자 양성에 주력하던 의상의 행적이나 ‘송고승전 의상전’에 서술된 의상의 엄격한 수행자로서의 면모, ‘일승법계도’와의 내용적 관련성이 희박한 점, 의상은 귀국 이후 처음은 왕경의 황복사, 부석사를 창건한 이후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멀리 떨어진 북쪽의 설악산 인근 해변을 찾아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가 화엄종에 관음신앙이 받아들여진 의상의 사후, 빨라도 9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지면서 의상을 새롭게 창건조사로 등장시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창건의 연기 설화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관음굴의 유적과 함께 낙산사에 전해지고 있던 관음소조상과 두 종류의 구슬이 중요한 화소가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둘째 문단은 의상이 낙산사를 떠난 뒤 원효 역시 관음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의 관음굴을 찾았으나, 관음의 응신, 곧 변화신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친견에 실패하였다는 내용이다. 근대 불교사학계에서는 의상의 관음신앙만을 주목한 나머지 원효와 관련된 설화는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원효는 확실히 의상의 신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연의 역할자로 등장시킨 것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은 낙산사의 유적이나 설화의 전승 과정에서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요건을 갖추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효는 관음 진신을 친견하려 가던 길에 남쪽 교외에서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을 만났고, 또 다리 밑에 이르러 개짐을 빠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두 여인은 모두 관음의 변화신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소나무 위의 파랑새(靑鳥)가 “제호화상(醍醐和尙)은 그만 두시오”라고 하고는 소나무 아래 벗은 신발 한 짝을 남겨두고 숨어버림으로써 다시금 관음 진신을 알아보는데 실패하였다. 뒤에 원효는 절에 이르러 관음상 자리 아래에서 앞에서 본 신발 한 짝을 보고서야 앞서 만난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다시 관음굴에 들어가 진용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이러한 내용에서 원효는 자신의 분별심으로 관음을 친견하지 못함으로써 낙산사 창건의 주역으로 참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면에서 의상보다 열등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낙산사 연기 설화 구성에서 관음굴과 관음의 변화신 이외에 관음송(觀音松)과 파랑새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파랑새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양양도호부 불우 낙산사조에 전재되어 있는 익장(益莊)의 ‘낙산사기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파랑새가 나타난다.’ 또한 명종 정사년(1197)에 유자량(庾資諒,1150~1229)이 병마사가 되어 10월 굴 앞에 와서 분향 예배하였더니,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유자량이 파랑새를 소재로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동문선’권9에서는 이 시의 작자가 익장으로 되어 있다). 또한 같은 책 고적 냉천(冷泉)조에서는, “오봉산 밑에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여인으로 변화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원효대사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웃음소리를 하였다”고 하였으며, 고려 말기의 정추(鄭樞)도 이 파랑새에 관한 시를 남겨주고 있었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원효는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지 못함으로써 미완의 성인으로 묘사되고 있었지만, 속설에서는 관음보살의 현신인 여인과 파랑새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민간에서 친숙한 이야기 소재로 제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원효가 낙산사 창건의 주역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의상보다 열등한 수준임을 나타낸 설화 내용으로 보아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는 의상 직계 법손들에 의해 전승된 설화로써 원효가 화엄종의 전승 과정에서 조사로서의 지위를 이미 상실하였던 불교계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추정된다. 원효는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길거리에서 대중교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낙산사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는 원효의 행적이나 사상 내용과의 관련성이 희박하여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셋째 문단은 대중 12년 무인(858) 선종9산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梵日)이 858년 낙산사에 정취보살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뒷날 낙산사에는 관음보살상을 모신 불전과 별도로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문단의 요지는 범일이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 명주(明州) 개국사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사미를 만나서 고향에 집을 지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고 하며, 그 뒤 범일은 강서종(江西宗)의 염관 제안에게 선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회창 7년 정묘(847)에 굴산사를 세우고 선법을 홍포하던 중 대중 12년 무인(858) 2월15일 꿈에서 명주에서 만났던 사미의 독촉을 받고, 명주(溟州) 지경 익령현 덕기방의 한 다리 밑 물속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돌부처를 발견하여 낙산사에 불전 세 칸을 짓고 봉안하였는데, 바로 정취보살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일의 정취보살 봉안의 설화는 의상과 원효의 관음보살 진신의 친견 및 관음보살상 조성의 설화와 비교할 때 설화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명확한 연대와 지명의 표기, 등장인물의 구체성, 이야기 구성의 현실성 등에서 의상과 원효의 경우보다 역사적 사실이 훨씬 가깝게 반영된 설화로서 이해된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넷째 문단에서 1253~1254년 몽골의 침략 당시 두 보살의 진용을 두 보주와 함께 양주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 낙산사는 관음보살뿐만 아니라 정취보살도 함께 모셔진 성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지도를 받아 53선지식을 찾는 구법 행각 중에 28번째로 만난 선지식이 관음보살이고, 이어 29번째로 만난 선지식이 정취보살로 전해진다.

  그런데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첫째 문단부터 셋째 문단까지 3개 문단의 내용은 낙산사의 창건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서술한 연기 설화라고 할 수 있는데, 3개 문단 전체의 구조와 내용을 다시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은 셋째 문단의 끝에 주석을 붙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의 3개 문단 내용이 고본(古本)에 의거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었다. “고본에는 범일의 사적이 앞에 있고,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사적이 뒤에 적혀 있으나, 살펴보면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일은 당 고종 때 있었고, 범일은 회창 이후이니 서로 떨어지기가 170여 년이나 된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는 앞 기사를 뒤로 물려 차례를 바로잡아 엮었다.” 이러한 일연의 주석 내용으로 보아 원래 고본에서는 범일의 사적이 의상·원효보다 앞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낙산사의 창건과정에서 범일에 의한 정취보살상의 봉안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 뒤에 관음보살상의 봉안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858년 범일이 먼저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을 짓고, 그 이후 관음보살상을 모시는 불전이 새로 지어지게 되면서 의상의 법손들에 의해서 고본의 내용과 같은 의상과 원효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가 만들어졌고, ‘삼국유사’ 편찬 때에 그 순서가 바뀌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상이 낙산 관음굴에서 관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고자 예배 발원하면서 지었다는 ‘백화도량발원문’이 최근 문헌학적인 검토에 의해 800년 이전에는 성립될 수 없었음이 밝혀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상의 관음보살 진신 친견의 설화도 800년대 중반 이후로 내려보는 것이 좀 더 타당성이 높은 견해로 판단된다. 

  한편 고려 이후에는 낙산사의 두 보살상 가운데 관음보살이 특히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관음굴이 관음보살 진신의 상주처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사’ 헌종 원년(1095)조에는 송나라 상인을 따라온 자은종 승려 혜진(惠珍)이 보타낙가산에 있는 성굴을 찾아보기를 청원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관음굴은 송나라에게까지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양양도호부 불우 낙산사조에는 고려중기부터 여러 문인들이 낙산사와 관음굴을 찾아 남겨준 시들을 수록하였는데, 그 문인들의 이름만을 들어보면, 김부의(1079~1136)·김극기(명종대)·유자량(1150~1229)·승익장(고종대)·안축(1287~1348)·정추(?~1382) 등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승익장은 ‘낙산사기문’을 남겨주었는데,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보다 50년 정도 앞선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두 기록은 동해의 낙산사 성굴에 관음 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중심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원효의 관음 진신 친견의 실패담과 범일의 정취보살 봉안에 관한 설화 등은 일체 제외됨으로써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에서 인용한 “고본”을 후대에 새로 정리하면서 의상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로 일원화시킨 결과물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관음신앙은 특히 몽골 침입을 겪으면서 진신 상주의 구도적인 신앙에 더하여 재난 극복의 현세이익 위주의 신앙으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낙산사의 관음보살상이 특히 주목받게 되었는데, 몽골 침입으로 피해를 당해 약탈당한 낙산 관음상의 복장(服藏)을 다시 채워 넣고 집정자 최항을 대신하여 이규보로 하여금 ‘낙산관음복장수보문’을 짓게 하였던 사실, 그리고 관음보살과 동해의 용으로부터 각각 받았다는 두 구슬(수정염주와 여의보주)이 국가적인 보물로 내전(內殿)에 간수케 되었던 사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09호 / 2023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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