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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선사들의 대기대용 방편 - 현대적 활용 및 그 의미

기자명 정운 스님

수행 전통 이을 법고창신 필요

옛 선사들 사용한 할과 방
중생들 이끌기 위한 방편
현대에 그대로 적용 어려워
새로운 방법 창안 고민해야

5주간에 걸쳐 선가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활발발한 선기와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언급했다. 앞 원고에서 언급했듯 선기의 획기적인 연출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 선사들의 활기찬 언행이 현시대에도 활용되는지를 보자.

현재 중국은 사찰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선종 사찰에서는 객당에 두 개의 향판을 세워놓는다. 향판 하나는 보편적인 청규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사찰만의 청규를 말한다. 그 향판에 ‘청규(淸規)’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선가의 엄격한 규율을 상징한다.

청대 이후로는 방(棒)보다 향판(香版)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 속담에 “매 아래서 효자 나고[棒下出孝子], 향판 아래서 조사 난다[香版下出祖師]”는 말이 있다. 향판이란 참선 시 졸거나 자세가 좋지 않은 경우, 경책하는 도구이다. 재질은 보통 떡갈나무이며, 길이는 90~100㎝, 폭은 4㎝ 정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장군죽비에 해당하는데 중국의 향판은 납작한 몽둥이라고 보면 맞을 듯하다.

허운 선사(1840~1959)는 50대 후반에 고민사(高旻寺)에서 수행하였다. 고민사는 강소성 진강에 위치하는데, 수나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현재도 사부대중이 함께 수행하는 선방이다. 고민사는 가풍이 엄격해 소임을 거절하면, ‘대중을 위해 시중들지 않는 나태한 자’로 낙인찍혀 경책을 받는다. 이 경책이란 대중 앞에서 향판으로 매를 맞는 것을 말한다. 허운은 대중 소임을 거부한 명목으로 경책을 당했다. 허운은 향판으로 맞아 피가 멈추지 않았고, 소변은 방울방울 떨어졌으며, 혼자서는 공양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허운은 당시에 죽음을 기다릴 정도로 심각했는데, 20여일 만에 회복되었다. 

또 근대 선사인 야개(1852~1922)가 수행 중에 유나에게 향판으로 맞았다. 선사는 향판으로 맞으면서 칠흑 같은 어둠이 순간 걷히고 밝아지는 각오(覺悟)를 경험했다고 토로했다. 20년 전 미국에서 선을 지도한 성엄 스님(1930~2009)의 기록에도 “좌선 중 게으름 피우는 사람을 보면, 향판으로 때려서 정진력을 촉발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그럼, 언어를 사용한 예를 보자.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은 상당법문에서 할을 자주 사용한다. 그 반대로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종종 스님들이 법석에 올라가 잠시 앉아 있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2018년 신흥사 조실 무산 대종사의 해제 법문이 회자된다. 대종사께서 법석에 올라가 “서로 한 번씩 얼굴 보았으니 나는 말 다 했고, 여러분들도 다 들었습니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또한 선방에서 소참법문이 행해지고 있다. 아침에 간단히 설하는 조참과 저녁 때 설하는 만참이 있다. 필자가 비구스님 선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10년여 전 겪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민사에서 이틀간 머물면서 그곳 대중과 함께 참선했다. 저녁 시간에 대략 100여명이 함께하는데, 1시간 참선 후에 큰스님께서 10여분 정도 법문하고 포행을 돌았다. 이렇게 포행 후에 다시 1시간 정도 좌선했다. 오전에도 비슷하였다.

그렇다면 시대적인 관점에서 선사들의 할과 방 등 대기대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필자가 중고생일 때, 선생님들의 매질은 보편적이었다. 학생들도 선생님의 매질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는 선생님들의 매질과 폭력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이와 견주어 선가의 할·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생각해보자. 제자가 질문했는데, 대답하지 않고 버럭 소리 지르거나 불친절한 말투로 대답한다면 이 시대 출가자들에게 통용될까? 또한 방망이를 사용해 게으른 제자에게 경책한다면, 젊은 출가자들이 ‘스승이 나를 공부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할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선사가 소리를 지르든 침묵하든 몽둥이를 내리치든, 이는 제자의 어리석음을 교화하기 위한 접화 수단이다. 한편 중생을 이끌기 위한 방편이다. 현 시대적인 관점과 세간의 법으로 선가의 전통을 비판한다면, 깨달음의 전등(傳燈)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접화수단이나 수행법이 법고창신(法古倉新)되어야 한다. 어떻게 옛것을 되살리고, 새로운 방법의 선을 창안할 것인지에 고민해야 한다.

정운 스님 동국대 강사 saribull@hanmail.net

[1709호 / 2023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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