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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상황 외면한 채 옛것만 고집해서는 설 자리 잃어”

  • 새해특집
  • 입력 2024.01.02 12:55
  • 수정 2024.01.03 03:38
  • 호수 1710
  • 댓글 3

금정총림 방장 정여 스님

월남전 참전하면서 생사 문제로 깊은 고민, 그곳에서 만난 해인사 출신 전우 권유로 출가 결심
승가대학 졸업 후 수도암·도성암에서 정진하던 중 은사스님 요청으로 금강암서 8년간 중창불사
쌍계사서 3년 정진 후 부산 한복판서 포교·복지 시작…어린이·청소년·직장인 포교의 이정표 제시

금정총림 제2대 방장 정여 스님은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까맣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더라도 그 위에 파란 하늘이 있듯 본래 마음에는 생사도 미움도 번뇌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금정총림 제2대 방장 정여 스님은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까맣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더라도 그 위에 파란 하늘이 있듯 본래 마음에는 생사도 미움도 번뇌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부산 금정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금정총림 범어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10대 화엄사찰 중 하나다. 근대기 한국 선의 중흥조 경허 스님이 머무르며 수많은 선지식을 양성했던 선찰대본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종사 여산정여(如山正如) 스님은 지난해 10월 말 범어사 산중총회에서 금정총림을 이끌 새로운 방장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됐고, 11월 1일 조계종 중앙종회 인준을 거쳤다.

범어사에서 벽파 스님을 은사로 산문에 든 정여 스님은 지난 50여 년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아왔다. 스님은 순리를 거스르지는 않되 인연이라 여겨지면 매 순간 정성을 다했다. 수행과 불사가 그랬고, 포교와 복지가 그랬다. 1974년부터 4년간 범어사 승가대학 과정을 마친 스님은 바랑을 짊어지고 수행의 길에 나섰다. 수도암과 도성암에서 화두를 붙들던 스님은 1984년 여름 범어사 금강암으로 돌아왔다. 은사스님의 요청으로 불가능할 것 같던 금강암 불사에 7년 6개월간 매진했다. 큰 법당인 대자비전을 비롯해 삼성각, 나한전, 후원채, 요사채가 하나하나 들어섰고, 구한말 영남지역 선풍(禪風)의 시발점이 됐던 금강암의 위용을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스님이 직접 쓴 한글 현판과 주련들은 지금도 금강암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진다.

스님은 붓글씨로도 유명하다.
스님은 붓글씨로도 유명하다.

스님은 금강암 중창 불사가 마무리되자 곧바로 선원으로 향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진임을 잘 알았다. 하동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맡아 꼬박 3년간 정진한 스님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은사스님을 찾아가 포교와 복지에 매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절에 오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이제 불교계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정여 스님은 은사스님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부산 양정시장 한복판에 여여선원 간판을 내걸었다. 불법의 바른 이치를 전달하고자 했으며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 평안함을 찾을 수 있도록 정성껏 지도했다. 스님의 진심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석달 만에 1400개 인등(引燈)이 법당에 켜질 정도로 사람들 발길이 이어졌다. 교리 강좌 때에는 주간반, 야간반, 금강경반, 육조단경반 등 통틀어 재학생이 1300~1500명에 이르렀다. 이는 불자들이 많다는 부산 불교계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스님은 직장인과 가정주부 외에 어린이·청소년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철저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어린이 법회를 운영했다. 법당은 아이들에게 친절한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즐거운 곳으로 인식됐다. 오래지 않아 수백 명의 아이가 법회에 참석했다. 스님은 어린이 포교가 활성화되려면 전문성을 갖춘 지도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1998년 대한불교교사대학을 설립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2001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장을 맡았을 때도 계속됐고, 700여 어린이 지도교사들을 배출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2012년에는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 6대 회장을 맡아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대한 원력을 꾸준히 지속해 나갔다. 특히 청소년 명상 프로그램 개발과 보급에 주력하고, 140여 명의 파라미타 명상지도자도 배출할 수 있었다.

스님이 무료급식하는 모습.
스님이 무료급식하는 모습.

스님은 불교 복지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1997년 개금사회복지관장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복지 활동을 본격화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했고 굶주린 사람은 먹어야 했다. 1999년 금정구 서동에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스님은 틈틈이 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밥을 퍼주었으며, 그 일을 16년간 이어갔다. IMF사태로 실직자들이 쏟아져나올 때는 노숙자 쉼터인 선혜마을 관장을 맡아 그들과 함께 지냈다. 불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사회복지법인 보현도량 이사장, 금정구종합사회복지관장, 부산금정시니어클럼 초대관장, 사회복지법인 범어 이사장, 부산불교복지협의회 초대회장 등을 맡아 불교의 자비 사상이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며, 사회복지와 맞닿아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왔다.

스님은 해외 구호에도 오랫동안 진력해왔다. 2011년 사단법인 ‘세상을 향기롭게’를 설립해 라오스와 미얀마에 기술학교를 건립하고 아프리카 아동 후원 등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환경 개선 사업을 펼쳤다. (사)로터스월드를 통해 동남아 아이들에 수백 대의 자전거를 여러 차례 전달했다. 수십 리 먼 길을 걸어 통학해야 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스님은 2008년 범어사 주지를 맡아 절 한가운데 위치한 보제루를 뒤로 옮겨 도량을 넓히는 등 숱한 불사로 도량을 일신했으며, 부산 양정동 여여선원 외에 상좌들과 함께 울산, 김해, 해운대, 통영 사량도 등에 도량을 조성했다. 국내 최대 동굴법당인 밀양 여여정사 불사 때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부산과 밀양을 오갔다.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을 조성하는 일이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이 다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2016년이었다. 세수로 70세 되던 해였다. 쌍계사 3년 결사 후 20여년 만에 방부를 들인 곳은 수행자들의 고향이라는 봉암사 태고선원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대흥사 동국선원, 백담사 무문관, 보경사 보경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미륵암 상왕선원,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 범어사 금어선원 등에서 안거 때마다 정진을 이어갔다. 수행의 근본은 참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세간과 출세간을 오가며 평생 수행과 포교 원력으로 게으름 없이 살아온 스님의 내면에서 선은 이미 무르익어 있었다.

스님은 그동안 대중 법문에서 우리 마음은 파란 하늘과 같음을 자주 언급했다. 지금 아무리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까맣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더라도 그 위에 파란 하늘이 있듯 본래 마음에는 생사도 없고 미움도 없고 번뇌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1월 27일 금정총림 제2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이 첫 동안거 결제 법어에서 역설한 것도 ‘일심청정경계청정(一心淸淨境界淸淨) 일심혼탁경계혼탁(一心混濁境界混濁)’이었다. 한 마음이 맑고 청정하면 바라보이는 세계도 맑고 청정하고, 한 마음이 혼탁하면 바라보이는 세계도 혼탁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법보신문이 방장스님을 찾아뵌 것은 12월 12일, 범어사 위쪽에 자리 잡은 안양암에서였다. 스님은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출가 인연과 포교·복지·불사에 매진했던 이유, 수행 과정 중 겪었던 일 등에 대해 들려주었다. 또 수행은 왜 해야 하며, 수행 문화가 어떻게 바뀌어 갈지, 범어사도 그 변화와 마주할 것이라고도 했다. 다음은 방장스님과의  일문일답.

-. 충북 괴산이 고향인데 어떻게 범어사로 출가하게 됐나요?
“군복무 중 월남전쟁이 일어나고 나도 1968년 1월 참전하게 됐습니다. 시가지 전투도 하고 공병대에서도 근무했어요. 한밤 작전 때 죽은 적군의 시체를 아침에 보았는데 그새 벌레들이 바글거리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어요. 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처참함,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 월남전 참전이 출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군요.
“전우 중에 해인사 스님이었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자주 얘기를 했는데 불교 얘기를 많이 들려줬어요. 기도하는 방법도 배워서 보초를 설 때면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출가를 권해서 절을 찾아가게 됐습니다.”

-. 은사인 벽파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종단에서 총무부장도 사시고 동국대 이사도 지내셨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시기여도 상좌가 수행하겠다면 언제든 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 은사스님이 강조했던 말씀이 있었나요?
“법(法)이라는 글자가 삼수 변(氵)에 갈 거(去)로 됐잖아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순리대로 살라고 하셨죠. 흐름대로 사는 것이 여여(如如)한 것이겠지요. 나도 억지로 한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인연이라 여겨지면 수행하고 포교하고 봉사했을 뿐이지요.”

“있는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받아들일 때 인생도 아름다워”

정여 스님은 “수행의 근본은 참고 견뎌내는 것”이라며 “끊임없이 쌓이는 게으름과 욕망의 먼지를 정진으로 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주영미 기자
정여 스님은 “수행의 근본은 참고 견뎌내는 것”이라며 “끊임없이 쌓이는 게으름과 욕망의 먼지를 정진으로 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주영미 기자

금정총림 2대 방장 추대된 후
포행·정진시간 등 새로운 시도
누구나 정진할 수 있는 틀 소중

수행은 마음 밭 가는 것과 비슷
한눈팔면 잡초처럼 번뇌 무성
대중이 함께 정진해야 바람직

-. 방장으로 추대된 후 변화된 것이 있나요?
“방장이라는 무게감, 많은 대중을 수행으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이 있지요. 범어사의 전반적인 문제,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쉽게 전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요. 그렇더라도 내면세계야 달라질 게 있나요. 허공에 구름이 끼었을 때는 구름 낀 하늘이라고 하고, 구름이 벗어나면 파란 하늘이라고 하지만 하늘 자체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잖아요.”

-. 스님께서 쓰신 글씨가 걸려 있는 곳이 많습니다. 글을 쓰시게 된 사연이 있었나요?
“금강암 불사 당시 은사스님의 요청으로 해보겠다고는 했으나 너무 막막했습니다. 다시 못한다고 말씀드리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와 잠깐 벽에 기대 졸았나봐요. 황가사를 입은 노스님 세 분이 나타나서 여기는 경허 대선사가 머무르시던 곳이다. 불사하면 공덕이 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붓을 하나 들려주셨어요. 그러면서 불보살님 명호를 3만 번 쓰라고 했어요.”

-. 그때부터 썼던 거군요.
“그냥 떠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불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매일 새벽 ‘나무관세음보살’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한 장 쓰기도 어려웠는데 나중에는 100여 장씩 썼어요. 절에 오시는 분들, 인연 닿는 분들에게 드렸어요. 한 번은 저녁 늦게 여러 스님과 차를 마시는데 어느 보살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내가 쓴 글씨에서 파란 불빛이 나온다는 거예요. 거사님도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글에 절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직접 가보니 멀쩡해요. 그런데 그게 소문이 나서 글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불사를 마무리하기까지 10만 장은 썼을 겁니다.”

-. 어렵게 불사를 마치고 곧바로 쌍계사 금당선원으로 가셨습니다.
“불사하며 보람이 있었으나 한편으론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불사를 매듭짓고 이튿날 떠났던 거죠.”

-. 쌍계사에서 3년간 정진 후 다시 포교와 복지 원력을 세워 실천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대만 스님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불광산사 성운 대사나 자제공덕회 증엄 스님 같은 분들이 몸소 찾아다니면서 불법을 전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기 때문이에요. 아픈 사람이 있으면 치료해 주고 집이 없는 사람에겐 집을 지어줬어요. 스님들이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불교의 역할이고 그럴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종교인들이 비판받는 시대에 무료 급식도 하고 김장도 더 나눠야 합니다. 복지는 자비의 실천이고 대중에게 다가가는 길입니다.”

-. 포교를 잘하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정성을 다해야지요. 한 분이라도 더 부처님 말씀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 소리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 집중해야 할 때와 내려놓아야 할 때를 잘 알고 실천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 나름대로 특기가 있듯 도반들이 내게 끈기가 있다고 해요. 뭘 하든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매듭을 짓는다는 거죠. 20여 년간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듯 포교하고 봉사했어요. 이 일을 어느 정도 매듭지었더니 칠순이에요. 그때 다시 선방에 간다니까 주변에서 반신반의했어요. 칠순 나이에 옛날 같겠냐는 거지요. 나이 들어 만용을 부려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지레 못하겠다는 생각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 봉암사 태고선원에서 젊은 스님들과 함께 수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수행의 근본은 참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때로 걸망을 메고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참고 참다 보면 오후 방선 죽비 소리가 들립니다. 하루도, 한 시간도 편하게 이어지는 때가 없어요. 수행 중에 음식과 잠을 조절하는 것도 좌복에 앉아 버티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야 무난히 정진할 수 있어요. 화두를 들고 화두 속에 살다 보면 정신이 맑고 초롱초롱해집니다.”

정여 스님은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새로운 수행문화를 이끌고 있었다.
정여 스님은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새로운 수행문화를 이끌고 있었다.

-. 2018년 여름에는 백담사 무문관으로 가셨습니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한 끼 넣어주는 식사로 석 달을 정진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요.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똑같은 수행의 일과가 반복됩니다. 대면하는 사람도 말할 상대도 없습니다.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무문관 수행은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코뿔소처럼 고삐를 늦추지 말고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
스님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

-. 그동안 정진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깨달음은 이미 자기 마음속에 다 갖추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가듯 얻을 것 없는 것을 얻는 것이라 하겠지요.”

-. 이번 범어사 동안거 기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새벽 3시 정진을 한 시간 늦춰 4시로 하고, 한 달에 세 번이던 삭발목욕일을 4번으로 늘렸어요. 1시간 정진하고 10분 포행하던 것도 20분으로 늘렸습니다.”

-.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선원에서 화장실이 멀어요. 수행은 자기의식 세계의 변화를 항상 맑고 고요하게 이끌어야 하는데 10분 안에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조급증이 날 정도로 서둘러야 해요. 느긋하게 걸어야 수행이 됩니다. 또 무릎과 골반을 충분히 움직여서 풀어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요. 몇몇 정진 잘하는 스님 위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 누구라도 정진할 수 있는 틀이 소중합니다.”

스님이 정진했던 백담사 무문관.
스님이 정진했던 백담사 무문관.

-. 대중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지난번 삭발목욕일에 차를 마시면서 젊은 스님들 얘기해보니 수행하기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반응들이었습니다.”

-. 새로운 변화를 걱정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한때 전기가 들어왔을 때 이를 거부했던 분들이 있었어요. 우리 수행풍토를 지켜야 한다는 거였지요. 그런데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도 들어왔어요. 옛것의 정신과 거기에 담긴 뜻을 이어가되 옛것을 고집해서 변화된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문화가 의자로 바뀌었어요. 무릎이 안 좋은 분들이 바닥에 앉으려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방장실에도 의자를 놓아 앉아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 여럿이 정진하는 게 좋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홀로 하는 독살이 정진은 상근기 중에도 아주 상근기나 가능해요. 음식과 잠을 조절하기 어렵고 게을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생활, 대중정진이 중요해요. 옆에서 정진을 잘하면 게으름을 부리려다가도 정진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모여 정진하도록 한 것은 꼭 우기 때문이 아니라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으셨을 거예요.”

-. 수행을 꼭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돈과 명예를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에 집착할수록 마음은 황폐해지고 괴로움이 커져요. 수행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내 허물을 보고 고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구름이 아무리 짙더라도 그 뒤에는 맑은 하늘이 있습니다. 수행은 파란 하늘,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수행은 마음 밭을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밭에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은 일상에서 꾸준하게 쉬지 않고 해나가야 해요. 끊임없이 쌓이는 게으름과 욕망의 먼지를 정진으로 떨어내야 합니다.”

-. 새해를 맞아 불자들이 늘 가슴에 새겨두어도 좋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산토끼도 자기 길이 있고 비행기도 하늘의 길이 있듯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 그게 내 길입니다. 이왕 가는 길 웃으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더 좋겠지요. 우리는 이미 이대로 완전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면 인생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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