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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청춘이다] 3. 청춘에 득도한 고승들

청춘의 열정·굳건한 체력 있기에 이룩한 깨달음의 환희

선사들 평균 오도 나이 32.4세
20~30대가 가장 많은 비율 차지

잠 이겨내고자 송곳·칼까지 들어 
오후불식·장좌불와 수행은 기본

연지공양하며 철저한 화두 참구
젊음이라는 자산이 수행의 기반

진영이나 사진으로 접하는 고승의 모습은 대부분 지긋한 세납의 노년을 담고 있다. 고승이 고령의 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든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은 고승들이 20·30대의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이뤘다. 목숨 걸기를 마다 않는 젊음의 열정, 고된 수행을 견뎌낼 굳건한 체력이 대각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경허·만공·혜암·경봉·일타·성철·청담 스님. 
진영이나 사진으로 접하는 고승의 모습은 대부분 지긋한 세납의 노년을 담고 있다. 고승이 고령의 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든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은 고승들이 20·30대의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이뤘다. 목숨 걸기를 마다 않는 젊음의 열정, 고된 수행을 견뎌낼 굳건한 체력이 대각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경허·만공·혜암·경봉·일타·성철·청담 스님. 

수많은 고승들은 청춘의 한복판에서 깨달음을 이뤘다. 2011년 본지가 조사한 43명 고승들의 평균 오도 나이는 32.4세였다. 그 가운데 30대가 절반이 넘는 22명으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14명으로 뒤를 이었다. 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승가공동체는 혈기 넘치는 청년이 모여있는 집단이었고, 불교는 활기넘치는 청춘의 종교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선사들의 목숨을 건 수행도 결국 굳건한 보리심과 맑은 식(識),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스님(1846~1912)도 젊음의 꽃이 만개한 시기에 깨달음을 이룬 참다운 선지식이었다. 은사를 만나러 가는 길, 콜레라가 만연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참한 장면을 목격한 스님은 생사, 깨달음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곧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발원한 후 ‘여사미거마사도래’ 화두를 들고 참선에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식사를 들였다. 위없는 깨침을 얻기 전에는 결코 나가지 않겠다 맹세한 스님은 턱 밑에 송곳을 대고, 한 손에는 칼을 쥐어서까지 잠을 자지 않고 처절한 수행을 이어갔다. 3개월이 지난 1879년 11월15일 “소가 코뚜레를 꿸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대오했다. 당시 나이 30세였다.

1884년 출가한 만공 스님(1871-1946)도 경허 스님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를 받고 정진했다. 스님의 나이 22세였다. 혈기왕성한 스님은 오로지 답을 찾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2년간 잠을 포기하고 단 한번도 눕지 않은 채 수행에만 몰두했고 1895년 1차 오도를 했다. 그러나 스승인 경허 스님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조주의 무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하라”는 가르침에 다시 수행에 매진했다. 깨달음을 끊임없이 갈구했던 스님은 31세가 되던 1901년 참선 삼매 중 통도사 백운암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번뜩 깨달음을 얻었다.

이 시대 대표적 선승인 혜암 스님(1920~2000)도 30대에 목숨을 건 고행 끝에 깨달음에 이른 인물이다. 27살의 나이에 출가한 스님은 문경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해인사 선원, 송광사, 칠불암 등 제방에서 정진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37세가 되던 해 1957년 “공부하다 죽으리라”는 발원을 세우고 오대산 사고암 토굴에서 목숨을 건 정진에 들어갔다. 바람이나 겨우 막는 흙벽, 마른풀을 얹은 지붕만 있는 움막이 스님의 수행처였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고, 오직 잣나무 생잎과 생콩 10알씩만을 먹으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초인적인 용맹정진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뤘다. 스님은 평생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을 철저히 실천하며 평생을 정진 이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일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경전의 한 구절을 읽고 충격을 받은 뒤 답을 구하기 위해 떠난 경봉 스님(1892~1982)의 오도 나이도 35세였다. 젊음이라는 자산과 깨달음을 구하겠다는 열정은 끊임없는 정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해인사 퇴설당, 금강산 마하연 등 전국 유명 선방을 찾아 공부에 몰두했다. 당시 스님은 졸음과 번뇌망상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피가 날때까지 꼬집고, 머리를 기둥에 찧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행의 길은 험한 길이었다. 소리내 울기도 했고,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한 겨울에는 얼음덩어리를 입속에 물고 독한 수행을 이어나갔다. 이후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스님의 용맹정진은 이어졌다. 엉덩이에 물집이 생길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며 화두타파 일념으로 정진을 이어가던 중 1927년 새벽 갑자기 벽이 무너진 둣 시야가 넓게 트이더니 동그라미 모양이 오롯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았음을 점검한 스님은 화두를 들고 다시 정진에 들어가 12월 13일 새벽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는 순간 마침내 개안의 경지에 올랐다.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기수 청담 스님(1902~1971)도 치열한 수행 끝에 33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살을 에는 강추위에도 스님은 졸음을 쫓기 위해 얇은 옷차림에 맨발로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했고, 얼음물을 온몸에 끼얹어 가며 용맹정진과 인욕행을 거듭했다. 화두를 붙잡고 앉으면 밥을 먹고 화장실 가는 일을 제외하고 일어나는 일이 없었고, 하루 3시간 이상 눕지 않는 극한의 수행을 반복했다. 십여 년에 걸친 고행 끝에 묘향산 설령대에서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위없는 깨달음을 위해 평생 일관된 삶을 추구했던 수행자 성철 스님(1912~1993)도 20대에 법열의 꽃을 피웠다. 성철 스님은 ‘대자유인으로 사는 것은 불가(佛家)에 귀의해 수행을 통해 진리를 깨달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무자화두를 들고 잠도 자지 않고 정진했다. 오로지 자신 앞을 가로막는 화두를 부수는 일에 몰두했고 3년간의 용맹정진으로 29세가 되던 해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얻었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 일타 스님(1929~1999) 또한 수행에 있어 남다름을 보였다. 강원 졸업 후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기 위해 운수납자의 길에 들어선 스님은 진양 응석사, 범어사, 창원 성주사 등지를 돌며 정진을 거듭했다. 한국전쟁 중에서도 기도수행은 멈추지 않았다. 1954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장좌불와와 매일 3000배 수행을 한 후 자신의 오른손가락 12마디를 연지공양했다. 연지공양으로 출세·명예 등 모든 미련을 잘라버린 스님은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 장좌불와, 오후불식을 지키며 6년에 걸친 피나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1956년 26세가 되던 해 홀연히 눈이 열리고 대환희심을 경험하며 그토록 원하던 일대사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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