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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것, 그대로

지난가을 내내 남의 일로만 여겼던 우울증을 앓았다. 친구의 말기 암 투병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정년퇴직을 앞둔 내 나이가 환갑 되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많다는 자각이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나 친구처럼 나도 이제 물리적으로 충분히 죽을 나이가 되었다는, 자연의 진실을 아프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2023년의 가을은 유난히 길었다. 갑자기 어릴 적 추억들이 가을비 우산 속의 연인들처럼 정겹게 말을 걸어왔고,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비현실적인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그즈음 수십 년 만에 어렵게 연락이 닿은 고향 친구들에게 맥락도 없는 긴 문자를, 그것도 자주 보내는 일을 반복하는 증상이 생겼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향수병에 젖은 중늙은이쯤으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나는 단기 기억의 뚜렷한 상실과 장기 기억의 생생한 보존이라는, 일종의 치매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거의 한 달 이상 잠을 잘 수 없었고, 입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체중이 무려 7kg이나 빠졌다. 어제와 오늘의 사건들이 한데 뒤섞이면서 도무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러다가 잘못된 선택도 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에겐 돌아가야 할 엄숙한 현재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가르침의 기회를 더욱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각오를 거듭 되새겨야 했다. 강의내용의 업그레이드보다는 학생들과 진솔한 만남의 기회를 더 많이 만들자고 다짐했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 어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각종 디지털 기기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구김살 없이 자랐기 때문에 매사에 자신만만하다. 그것을 자기밖에 모르는 싸가지 없음으로 단정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지향한다. 여기에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마음씨까지 지녔다. 이처럼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뭔가 불만을 제기할만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기성세대는 오히려 청년세대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종립 동국대에서 이런 청년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학기마다 직접 목격하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았다. 고맙고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나의 계획은 ‘하던 것, 그대로’ 지금처럼 계속하는 것이다. 복싱체육관에도 변함없이 나갈 것이고, 불교 원전 언어 공부도 중단할 마음이 없다. 정년과 동시에 대학원 불교학과에도 새로 입학할 예정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 만큼 대학원에 들어가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인 투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태껏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에 교수의 지위와 명예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조그만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새까맣게 어린 후배들과 같이 원어로 불교 경전을 읽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어쩌면 그것은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나만의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감히 아름다운 이기심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다. 다행히 가족과 주변 지인들도 응원을 보내고 있어서 용기백배다. 대학원 제자들은 ‘지도교수 대학원 후배 만들기’ 프로젝트도 추진할 모양이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갑진년 새해 벽두부터 용솟음치는 청룡의 기운을 느낀다.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작년이 되고 만 계묘년 2023년 12월과 어느덧 신년이란 이름의 갑진년 2024년 1월을 아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익숙했던 올해가 다시 새로운 한 해로 바뀌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나의 어리석음이 낳은 후유증이거나 부작용 탓일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겪는 이른바 성장통이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올해는 왠지 더 헛헛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몸의 나이는 언제나 마음의 나이와 함께 연동되는가 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다. 법보신문 가족과 독자 여러분,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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