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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마지막 경지에서는 내가 없다) 

기자명 진우 스님

마음이 청정하고 평온하면 진정한 ‘불국토’

정토는 상이 없어지면 결국 공한 이치 드러남 알리기 위한 방편
억울함이나 속상함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참선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인과 철저히 이해해서 참는 힘 길러야 

장엄불토 말하면 이미 장엄불토가 아니게 된다. 장엄 말하는 순간 상이 있는 장엄 되니, 중생을 제접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법보신문DB]
장엄불토 말하면 이미 장엄불토가 아니게 된다. 장엄 말하는 순간 상이 있는 장엄 되니, 중생을 제접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진짜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만이 장엄이라는 것이다.

보살이 스스로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이는 사상(四相)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득(得)과 법(法)이 이미 있게 되는 것이니, 얻는다는 득은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므로 아상일 것이요, 법은 사람의 인(人)이요, 장엄은 중생이요, 불국토는 수자(壽者)인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이 있고야 어찌 보살이라 할 수 있겠는가? 불토라 하는 것은 마음이 청정함을 이름이요, 장엄이라 하는 것은 모든 법이 구족하다는 뜻이니, 보살이 사상이 없이 실무유법(實無有法)으로 무량중생을 제도하게 된다면, 깨끗한 마음, 즉 불토가 이미 청정하게 나타나 있을 것이요, 깨끗한 마음 땅 즉 불토가 나타날 정도면, 이미 모든 법이 구족하여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장엄불토(莊嚴佛土)라 할 수 있을 것이거늘, 여기서 어찌 보살로서 장엄붙토를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보살이 장엄불토를 말한다면, 이는 벌써 진정한 장엄불토는 이미 달아나고 없을 것이니,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 된다. 즉 불토를 장엄했다고 한다면, 인과로 인하여 이미 분별을 짓는 것이 되어, 불토는 불토가 아닌 것이 생기게 되고, 장엄은 장엄 아닌 것이 이미 생기게 되는 고로, 이는 불토와 장엄은 이미 불토와 장엄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진짜 장엄불토가 될라치면, 장엄이다 아니다, 불토다 아니다는 등의 좋고 싫은 고락인과가 완전히 사라져서 불토라 할 것도 없고 장엄이라 할 것도 없이, 마음이 평상심이 되어 평온 평안해 있어야 한다. 이를 이름하여 진정한 불토라 하고 장엄이라 할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법회 자체가 없다가 이제는 법회를 할수 있게 됐다. 그런데 법문을 할때마다 매번 고민하게 된다. 소중한 시간이 재미로만 허비되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거듭 거듭 강조하듯이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면 결과 또한 절대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당연히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심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며 원하는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이 또한 한 때에 지나지 않을뿐 그 과보를 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좋다 싫다는 고락의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진짜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만이 장엄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께서 말씀하신바, 장엄불토가 장엄불토가 아니므로 장엄불토가 되는 까닭이다. 장엄불토라는 것은 본래 허망하여서 실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하여 그 이름이 생긴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상을 구족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땅이 깨끗해야 스스로 구족할 것이니, 장엄을 말할 틈이 없을 것이요, 그래서 장엄불토라고 하면 이미 장엄불토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상이 없는 장엄에 대해 말했으나, 상이 있는 장엄 즉 유상장엄(有相莊嚴)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중생을 제접하는 방편의 지혜인 것이다.

그럼 방편(方便)이란 무엇인가? 본래가 정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장엄불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엄불토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기 위하여 장엄불토라는 방편을 사용함이다. 또 지혜란 무엇인가? 상을 없애기 위하여 공의 이치를 능히 알아내는 것을 말한다. 또 불토란 무엇인가? 중생에게 상이 없고 분별을 멸하면 이를 정토라는 방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 정토는 무엇인가? 상이 없어지면 공한 이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장엄불토가 이러하거늘 만약 보살이 망령되게 불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장엄불토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견혹(見惑)에 빠진 것이니, 어찌 보살이라 하겠는가? 하심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라도 좋고 싫은 고락을 분별 짓지 않는 것만이 결국 성불케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수억의 사기를 당했습니다.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사 입으면서 평생을 모은 돈인데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사기를 당할까요?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고 입이 써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요. 도대체 귀신도 없나? 세상이 어떻게 이리돼 먹은 걸까요?” 어떤 이의 피맺힌 하소연이다. 세상에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까? 사기를 당한 이의 입장에서는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다. 다만, 잘 모를 뿐이다. 우선 사기를 친 사람이나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좋고 싫은 고락의 업이 현실의 인연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기를 치는 사람은 즐거운 낙업이 나타날 때가 되어 돈을 얻음으로써 즐거워지게 된 것이고,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괴로운 고업이 나타날 때가 되어 사기를 당함으로써 괴로워지게 된 것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전생을 포함하여 과거의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인한 인과로서, 현실의 과보 인연으로 나타나, 사기 치고 사기를 당하는 일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를 치거나 사기를 당하는 일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인연 과보로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연이란 없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는 것이다. 물론 사기를 쳐서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다음에 언젠가는 그 과보로서 괴로움의 인과를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기를 당하여 괴로운 사람은, 다음 언젠가는 그 인과의 과보로서 어떤 형태가 되었든 즐거움의 인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를 당했다 하여 무조건 화내고 속상해만 한다면, 과거에 지었던 낙업이 다할 때까지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반드시 인과의 업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재빨리 마음을 머물지 않도록 잘 다스려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편안해진다. 이것이 곧 인욕이고 참선이다. 만약 사기를 당하여 속상한 마음이 생기기 이전에 미리 돈에 대해 애쓰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거나, 업덩이라 할 수 있는 돈을 사기당하기 전에 미리 보시로서 회향한다면, 사기를 당하는 업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그 어떠한 억울함이나 속상함에도 마음이 머물러 주(住)하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 없이 공한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이는 최고의 복과 참선이 되어, 좋지 않은 악업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수보리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여래 설명진시보살(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도 없고 법도 없음을 막힘없이 환하게 통달한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이를 이름 하여 참다운 보살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이라는 것이 본래가 그러그러하여, 아(我)와 법(法)이 그러하고, 얻음과 장소가 그러하고, 모습과 움직임이 그러하고, 이름과 말함이 그러할 뿐이다. 그러하다는 견해와 지식까지도 그러하고, 깨달은 보살도 또한 그러하고, 깨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그러하고, 일체 자취가 없이 저절로 그러하여서, 그렇게 공에서 그러한 소식이 묘하게 그러히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곳이란, 실상의 깨끗한 상이면서도 깨끗하다는 상을 두지 아니함이니, 하물며 나와 법을 둠이겠는가?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이러한 뜻을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니 ‘아(我)와 법(法)이 없는 곳을 통달하는 자만이 여래가 진시보살(眞是菩薩)이라 이름하리라’ 하심이다.

“스님!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참으라는 것은 결국 나만 손해 보는 일 아닌가요? 또 참다가 화병이라도 난다면 그 보상은 어디서 받나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어느 정도지,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백번 천번 공감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으라는 것은 아니다. 참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한다. 참을 수 있는 한 참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다만 참는다는 것은, 참지 못해서 오는 후과가 너무 커서 참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참으라고 하는 진짜 본뜻은, 상대를 공격하지 말라는 뜻도 있겠으나, 그 이전에 탐내고 성내고 잘못된 생각, 즉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것을 참으라는 말이다. 삼독심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괴로운 일이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인과의 소치인 줄 알아야 한다. 우연히 재수가 없어서 생기는 일은 세상에 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까맣게 모르고 나의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기분이 좋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던 과거의 일이 있었던 인과로 인하여, 그만큼 기분 나쁘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소치이니,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참지 못하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내가 지은 낙업(樂業)에 대한 고업(苦業)의 과보를 받지 않으려 참지 못하고 다시 탐진치 삼독심으로 화풀이하게 된다면, 받아야 할 과보는 그대로 남게 될 것이고, 다음에 언젠가는 다시 남아 있던 숙제가 치러지게 되어 더 큰 고통과 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을 상기할 것도 없이, 멋있게 복수하고 갑절로 되갚아 주게 된다면 우선은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을 것은 사실이나, 고락의 인과가 발생되어 기분 나쁜 과보가 나타나 그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참아야 하는 이유와 그 원인에 대해 인과의 뜻을 철저히 숙지하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참는 힘을 기르라는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병 나지 않고도 저절로 참는 힘이 생기게 되고, 스스로의 업을 멸하게 되어 화가 나지 않는 좋은 인연만 만나게 될 것이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삼독심을 멸하게 하는 좋은 연장이 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11호 / 2024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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