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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성과 공유하는 장(醬)

사찰서 담근 장은 백성 치유하는 약으로도 기능

사찰에서 등장하는 장에 관한 최초 언급은 ‘삼국유사’ 김현감조
호랑이 죽기 전 자신이 해친 사람들 상처 장으로 치유하길 요청
고려 승가 음식은 주로 밥·소채·장류…소욕지족 정신 세계 향유

김천 송학사, 서울 성북동 수월암, 칠곡 정암사는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주호·진묘·혜범 스님]
김천 송학사, 서울 성북동 수월암, 칠곡 정암사는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주호·진묘·혜범 스님]

1540년대에 찬술되었다고 하는 조선 시대 음식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장(醬)의 일종인 시(豉)의 제조법으로 ‘봉리군전시방(奉利君全豉方)’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봉리군’은 고려말 천태종 승려인 신조(神照)를 가리키는데, 그는 고려말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전장 터까지 자발적으로 참가하였는데 고려말 우왕3년 9월에 이성계가 해주에서 왜구와 싸울 때는 이성계를 위해 손수 고기를 썰어 요리를 만들고 술을 올렸다고 ‘고려사절요’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공신 목록에도 올라가 있으며 고려 왕실 정치에도 관계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이긍익(1736~1806)의 조선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신조는 “용력이 뛰어났으며 태조를 따라 사냥하는 곳이나 전장이나 항상 따라다니며 이성계를 모셨고 자신은 비록 고기를 먹지 않지만 음식을 드릴 때마다 손수 고기를 베어서 요리하였고 조선 개국 후에 공을 인정받아 봉리군(奉利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 봉호를 따서 ‘봉리군전시방’이라는 장류 제조법이 조선 음식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되는 한국 장류(醬類)의 역사에서 사찰과 승려는 한국 기저 음식인 장류와 김치류 제조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적 존재이다. 장류는 한국인의 음식 생활에서 승속을 불문하고 필수불가결한 음식이었으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그리고 대량 생산의 장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집단은 불교사찰이 유일하다. 

현재 장류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의 대부분은 사찰과 관계된 것이다. 2015년에 발굴된 통일신라기 남원 실상사 장고(醬庫)는 정면 1칸 이상,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지로 장고 내부는 대형 항아리를 묻은 구덩이 38기가 폭 5.4m의 중심 칸에 4열씩 열을 맞추어 발굴되었는데 장류 항아리는 밑이 둥근 것과 편평한 것 등 여러 종류로 입자가 고운 모래땅에 구덩이를 파고 점토를 바른 후 묻었다.

2017년에 발굴된 통일신라기 삼척 흥전리사지 장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로 내부에 큰 항아리 12점이 묻혀 있었으며 2018년에 발굴된 경주 성건동 유적에서는 8세기 건물터 유적 4기와 대형 항아리 50여 개가 발굴되었는데 조사 구역 남쪽 200m 떨어진 지점에 삼랑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풍탁이 나왔다는 점에서 왕실 창고보다는 사찰 장고일 가능성에 무게가 두어지고 있다.

사찰과 관련된 최초의 장에 대한 언급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는 흥륜사 탑돌이에서 인연을 맺은 김현과 처녀로 변신한 호랑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부부의 연을 맺은 호랑이는 낭군을 위해 자신을 죽여 김현을 벼슬에 오르게 한다. 호랑이는 김현이 벼슬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백성들을 해치고 스스로 김현 앞에서 목을 찔러 죽는다. 호랑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절을 짓고 불경을 염송하여 좋은 과보를 받게 해주기를 부탁하고 자신이 해친 사람들의 상처는 ‘흥륜사의 장(醬)’을 바르고 나팔 소리를 들으면 쾌유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찰의 장은 승려들만을 위한 식료가 아니라 백성들과 공유되는 것임을 김현감호(金現感虎)를 통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백성들의 약으로도 기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摧邪)조는 선덕여왕 재위 시기(632~647)부터 흥륜사가 치병(治病)과 관련하여 중심적 도량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신라 최초의 밀교승인 밀본(密本)법사가 선덕여왕의 오랜 병을 ‘약사경’ 독경으로 치유해 준 사찰이기도 하였다.

백성과 공유하는 사찰의 장문화(醬文化)의 모습은 고려 시대 전란이나 기근 등 위난 시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고려사절요’ 문종 18년의 기사는 고려왕조가 개국사의 사찰 인원과 시설에 의지하여 홍수로 피해를 입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북로에 위치한 여러 주현의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이 연이은 기근으로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 병마감창사 및 수령관으로 하여금 지역을 분담하여 진휼케 함이 가하다 하시고 곧 의복을 하사하시었으며 또한 개경의 기근에 대하여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굶주린 백성 3만여 명에게 쌀, 잡곡, 소금과 장(豆豉)을 하사하여 진휼케 하였다.’

고려왕조의 백성 구휼 정책과 관련하여 고려 불교교단이 그 집행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 이외에도 고려의 승려들은 중생구제의 불법을 따르는 승려로서의 보시도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에는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의 음식 보시행이 언급되어 있다.

중희 갑신세(1044년)에는 광제사 문앞에 솥을 걸어놓고 밥과 국을 끓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는데 천 곳의 곳간 분량을 탕진하였으나 백곡을 베풀고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고려 불교 승려의 음식 생활은 곡류로서의 밥, 소채와 소채를 먹기 위한 장류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이 소박한 밥상으로도 수행자는 소욕지족의 정신세계를 향유하고 있었다. 

고려 말 수선사 제6세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 1226~1292)의 시문은 장류 생활과 소욕지족의 선 수행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상골봉 앞에는(象骨峯前兮)/ 죽과 밥이 부족하지 않고(粥飯無虧)/ 마구당 아래에는(馬駒堂下兮)/ 소금과 장도 부족하지 않네(鹽醬不少)// 진한 차로 갈증을 없애고(~渴)/ 향기로운 소채로 허기를 해소하네(香蔬足療飢)/ 여기에 깊은 맛이 있는데(箇中深有味) 아는 이 없으니 또한 즐겁네(且喜沒人知).”

공만식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kms3127@hanmail.net

[1712호 / 2024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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