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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의사지

기자명 임석규

신라 태종무열왕 창건하고 조선 왕실 비호 받은 사찰

‘삼국유사’‘삼국사기’ 등 역사서에 폭넓게 등장한 중요 사찰
물질적 증거 세검초 내 당간지주뿐…규모·배치 가늠 어려워
최근 발견된 장의사명 기와로 대규모 중창불사 등 추정가능

세검정초 내 위치한 당간지주[불교문화재연구소]

1930년 2월 4일자 ‘조선일보’는 잘생긴 석조귀부의 사진과 함께 ‘唯一한 新羅古蹟인 石彫刻의 龜首發見’이란 기사를 싣고 있다. 기사에는 “경성 교외에서 단 하나인 신라시대의 고적을 총독부촉탁 加等灌覺(가토 간카쿠), 경성부사 편찬주임 岡田貢(오카다 미츠구) 양 씨가 발견하였다. 창의문 밖에서 세검정을 지나 북한산을 향하여 약 10정(약 1km) 되는 구기리 80번지에서…비면이 없어 누구의 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큰 절이었던 장의사의 유적과 가깝고…”라고 쓰여있다. 

석조귀부가 있었다는 구기동 80번지에는 현재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고, 돌거북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 기사에서는 발견자 두 사람의 감정에 따라 서울에서 유일한 통일신라시대 석조각이라고 했지만 형태나 양식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작품이라 생각된다. 비신도 없어서 이 석조귀부가 어느 사찰, 어느 스님의 것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가까운 곳에서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재단법인 수도문물연구원이 귀부로부터 약 15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택신축부지를 발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장의사'(莊義寺)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장의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등장하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창건 배경에 대한 두 사료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과거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현재의 충남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 장수 장춘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종무열왕이 659년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몸소 ‘장의사재문’을 지었고, 예종, 인종, 의종 등이 남경을 순행하면서 장의사를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종대사 찬유 스님과 법인국사 탄문 스님이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자정국존 미수 스님은 장의사 주지를 지냈다는 기록이 고승들의 비문에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의 기신제를 이 절에서 지냈고, 태종의 첫 기재가 장의사에서 설행되었으며,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초재 또한 장의사에서 열리는 등 왕실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장의사를 철거하고 그 터에 넓은 화단을 만들어 각종 화초를 심으라’는 명을 내린 이후 사찰은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장의사지 주변 위성사진[구글], 장의사지명 기와[수도문물연구원].

장의사지의 위치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삼거리에 위치한 세검정초등학교 주변이라 여겨지고 있다. 운동장 한구석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당간이라는 일종의 깃대를 지탱하기 위해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두 개의 돌기둥을 말한다. 

2022년 10월에는 당간지주가 있는 세검정 초등학교 서편 담장에 인접한 ‘신영동 공영주차장부지 내 유적’에서 고려시대 건물지가 조사됐다.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기와는 물론 통일신라시대 기와까지 출토됐기 때문에 창건기 장의사와 관련있는 유적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직도 초등학교 주변에서는 심심치 않게 기와 조각이나 그릇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장의사는 ‘삼국유사’‘삼국사기’는 물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책, 고승들의 비문 등에 폭넓게 등장하는 중요한 사찰이지만 물질적 증거는 당간지주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동안 사찰의 규모나 가람배치 등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2023년 7월 장의사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장의사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구기동 유적에서 장의사명 기와가 발견되기 얼마 전 이 유적 바로 옆 현장에서 규모가 큰 고려시대 건물지가 출토돼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영동 생활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이 그것이다. 구기동 유적과 행정동명이 달라서 다른 유적 같지만 발견된 건물지들의 양상을 보면 같은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대규모 건물지들과 함께 승안(承安) 3년(1198년)이라고 새겨져 있는 기와 조각과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됐다. 이 유적은 고려시대 궁이 있던 개경에서 남경(지금 서울)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위치한 점이나 난방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지들로 인해 북한산 승가사나 장의사를 찾던 고려 국왕이나 귀족들이 머물던 숙소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아직 확정하기는 어렵다. 

서울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문화유적을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특히 고려시대 대규모 건물지가 발견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구기동에서 발견된 대형 석조귀부를 포함해서 최근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종로구 구기동·신영동 지역 건물유적들의 성격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이 지역 문화재의 상징같은 장의사 당간지주로 눈을 돌려 그 주변 지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글어스에서 제공하는 위성사진을 보면 장의사 당간지주를 포함해 고려시대 건물지가 출토된 지역은 북한산 남쪽 자락 말단부에 해당하며 그 남쪽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고 있는 매우 넓은 평탄지이다. 현재 이 평탄지의 중앙에는 신영동 삼거리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진흥로가 나있다. 진흥로를 따라 구기터널 쪽으로 진행하면 통일로와 만나게 되는데, 그 길은 고양-교하-개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다.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남경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이기도 했다. 

유적들의 입지 조건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주변 유적들 전체를 아울러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발굴조사가 실시된 유적에서는 같은 시기, 같은 유형의 기와가 출토됐다고 한다. 이것은 이 유적들이 같은 시기에 운영됐으며, 유적의 성격 또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유적과 유물이 가리키는 지점에 장의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구기동 석조귀부 정도로 크고 조형적으로도 우수한 돌거북이 받쳤을 비석이라면 분명 상당한 지위에 오른 스님들의 것이었을 텐데, 그런 분들이 머물렀던 사찰은 주변에서 장의사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창건기의 장의사는 현재 당간지주가 남아있고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출토된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남경이 설치되면서 왕들이 남경과 북한산의 사찰을 자주 찾게 되자 장의사는 대규모 중창불사를 한 것 같다. 이때 석조귀부와 장의사명 기와가 출토된 건물지가 있는 곳까지 사찰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보는 건 지나친 억측일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1712호 / 2024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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