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7. 본래성불에 입각한 일상화된 선 

기자명 정운 스님

마조선의 토대, 유마경·능가경

대승불교 경전 외면하고서
선사상 이야기할 수 없어
마조가 강조한 ‘평상심시도’
유마경서 영향 받은 사상

중국 선종은 인도불교와 차원이 다르다. 인도불교에서 탈피해 완전히 중국화된 문화와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문화의 코드로 변형된 점은 선이 일상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달마가 중국에 입국[대략 520년]하기 이전부터 중국에 선수행자가 있었다. 곧 중국 선종의 역사는 달마를 처음 기점으로 보지만, 선사상적 측면에서는 그 이전인 200∼30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처음 중국에 선이 수입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선을 도교적인 성향에 견주어 이해했다. 즉 신비스럽거나 감통(感通)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면 맞을 듯하다. 지금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은 승려가 도술을 부리고, 신통 변화하는 인물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승려를 사주·역학 등에 정통한 사람이나 무당의 사촌 형쯤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나말여초의 도선(道詵, 827∼898)국사는 풍수의 대가가 아니다. 물론 도선 국사가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했다고 한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맞다. 그런데 고려가 개국의 정당성을 드러내고자 도선 국사를 이용했다고 보는 측면이 더 정확하다. 또한 당시 풍수와 관련된 저술은 모두 도선의 저술이 아니다. 도선이라는 저술가로 가탁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도선 국사는 엄연히 나말여초 동리산문 혜철 선사의 제자이다.

‘중국선으로 돌아오자. 이렇게 선을 신통스런 이미지로 인식하던 중국선이 6조 혜능(638∼713)에 이르러 중국화된 선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을 이루었다. 이어 8세기에 활동한 마조에 이르러 일상에서 수행하는 종교로 탈바꿈되었다. 즉 형이상학적으로 여겨지던 선이 현실의 질척질척한 삶 속에 살아있는 종교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중국불교가 인도불교와 다르게 발전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마조에게서 어떻게 일상선의 선으로 저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마조가 일상에서 구현한 선사상의 연원은 대승불교 경전[법화경·능가경·화엄경·관무량수경 등]이다. 실은 마조만이 아니라 마조 이전이나 이후 선사들이 선종 자파(自派)의 선사상을 정립하는 데 대승불교 경전을 활용했다. 

대승경전에서 활용한 사상은 돈오와 반야사상이다. 이런 점에 기인해 필자는 한국불교를 말할 때마다 대승불교 경전을 강조한다. 근자는 우리나라에 위빠사나와 심리학 계열의 명상이 유행하다보니, 대승경전과 간화선이 찬밥 신세이다. 결코 대승경전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대승불교 경전 따로 있고, 선사상이 따로 있지 아니하다. 대승불교 경전이 있었기 때문에 현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와 선풍이 존립함을 상기하자.

마조는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특히 ‘유마경’·‘능가경’을 활용해 일상성의 선을 정립했다. ‘마조어록’에 나타난 ‘평상심이 도’라는 부분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진리를 철저히 증득하면, 때에 따라 옷 입고, 밥 먹으며 성인[覺者]이 될 수 있는 역량을 발전시켜 나간다. 또한 주어진 대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이외 그 어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조는 신체의 움직임, 작용들이 모두 마음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옷 입고 밥 먹는[著衣喫飯] 일상들을 마음이 만들어 내며, 그 일상에서의 마음[心]이 바로 부처이다[➙卽心是佛]. 일상의 삶에서 평상심이 그대로 유지되면, 바로 그대로가 부처 경지인 것이다. ‘유마경’의 ‘4위의(四威儀)가 도량(道場)이요, 3업(三業)이 불사(佛事)’라는 말은 인간의 일상행위인 행·주·좌·와·어·묵·동·정, 일체 동작이 법계(法界)가 되며, 신구의 3업이 전부 부처의 행이다. 이는 마조가 유마경의 “어느 곳이든 발을 올리고 내리는 모든 행위가 도량으로부터 나와 불법에 머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부분에 영향을 받았다. 선자(禪者)가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자리[도량]에서 나와서 불법에 안주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실현은 일상의 삶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간명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정운 스님 대승불전연구소장 saribull@hanmail.net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