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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초대 어장 차오지와 어산범패

기자명 윤소희

공중에서 들리는 범찬에 음 붙여 어산범패 창제

부친 조조, 즉석에서 문장을 지어 읊자 “너는 천인” 감탄
수많은 문장 대부분 유실…‘백마편’ 등 통해 웅건함 추정
어산 ‘범패 근본도량’ 뜻…중국 정부, 국가유산 2호 지정

조식의 묘비(위 왼쪽)와 조비·조조·조식의 동상(오른쪽), 산동성에 위치한 조식 묘역(아래 왼쪽) 및 전시관과 범음동 입구.

붓다의 말씀이 중국으로 들어온 초기에는 말씀 그 자체를 외는 음성경전이었다. 이들을 한어로 전환하여 기존 율조에 얹어보니 어그러졌다. 붓다의 말씀과 그를 칭송하는 범음이 뜻글자인 데다 고저승강(高低乘降)의 한어 율조와 맞지 않아 겉돌고 있던 그때 천재 시인 차오지(曹植·192~232)를 만났다. 차오지는 10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시론(試論), 사(詞), 부(賦)와 같은 문장을 읊을(頌) 수 있었으며 스스로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부친인 조조가 아들의 재능이 믿기지 않아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자신의 것이라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다. 지(植)가 부친께 나아가 즉석에서 문장을 지어 읊자 “너는 천인(天人)이구나”라며 감탄하였다. 이러한 조식(이하 문맥에 따라 차오지와 조식을 병기함)이 어느 날 범천의 소리를 듣고 그 성절(聲節)을 따라 문장을 만들고 음을 붙여 어산범패를 창제하였다. 이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영감이 떠올라 한어 범패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공중에서 들리는 청량애완(清揚哀婉), 독청양구(獨聽良久), 심유체회(深有體會)의 그 음절을 그대로 음미하며(乃摹其音節) 범찬에 음을 붙여(寫為梵唄撰文制音) 여섯 계(其所制梵唄凡有六契)가 되었다. 당시는 역경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5언·7언 절구 시형(詩型)이 정형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여섯 가지에 대한 구체적인 문형과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는 수많은 문장을 지었지만 대부분 유실되었고, ‘백마편(白馬篇)’ ‘칠애시(七哀诗)’ 등을 통해 웅건한 시체와 감성적이고 우아한 산문체를 간신히 추정할 수 있다. 

범패를 지었을 당시 조식은 산동성 태안부(泰安府) 동아현(東阿縣) 서쪽에 있는 연주(兗州)에 머물고 있었다. 조식이 지은 범패를 어산(魚山)이라 하니 물고기를 떠올리지만 실은 범패의 근본도량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에는 “니민달라(尼民達羅)가 설하는 지지산(持地山)의 형태가 바닷속 물고기를 닮았다”고 하며, ‘법원주림(法苑珠林)’ 제3권에는 “그 산의 높이는 1200유순(由旬)이고, 수미산을 둘러싼 구산팔해(九山八海) 중 제7의 산을 어산이라 한다”고 했다. 승가의 총림을 산(山)이라고 할 때 마운틴이 아니듯이 ‘어’와 ‘산’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관과 문화적 배경이 함축돼 있다. 

조식은 한나라 헌제(獻帝)가 집권하던 초평(初平)3년(192)에 동한(東漢:현 샨동성 쥐엔청현(鄄城縣) 혹은 안후이성 보저우시(亳州市)로 보기도 함)에서 태어나 위나라 태화6년(232) 12월 27일 41세의 나이로 위진현(현 허난성 화이허현(淮陽縣))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 시(思s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한국식 한문 발음으로 ‘진사왕 조식’이라 한다. 진(陳) 고을의 시왕이며, 성은 차오(曹 cáo) 이름은 지(植 zhí)라, 태어난 시기는 한대(漢代), 조조가 위나라를 세웠으므로 부왕인 조조(曹操), 형인 피(丕 pī), 조카 루이(叡 ruì)의 집권 하에서 살았다.

모친은 변(卞)씨였고, 아들이 넷 있었는데 지는 셋째였다. 부친 조조로부터 받은 봉작이 평원후, 동아왕, 진왕에 이르기까지 여럿이었으나 형의 시기를 받아 고난을 겪었다. 남송의 유의청이 편찬한 ‘세설신어(世說新语)’에 피(丕)가 아우 지의 재능과 학식을 질투했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피가 지를 불러 “형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7보 이내로 형제애를 짓지 못하면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지가 그 자리에서 “콩을 삶아 국을 끓이고(煮豆持作羹), 콩을 빼서 즙을 만드네(漉菽以为汁). 가마솥 아래 딱정벌레가 타고(萁在釜下燃), 가마솥 안에 콩이 울고 있네(豆在釜中泣). 같은 뿌리에서 났는데(本自同根生) 왜 서로 이러한가!(相煎何太急?)”로 7보가 되기 전에 형제애를 읊은 것이 그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七步詩)이다. 진왕이라는 봉작을 받았을 때 조식은 이미 영어의 몸이라 자유가 없었고, 수년간 강제로 이주하며 지쳐있었다. 태화3년(229년)부터 동아에서 3년간 머물던 그 시기를 ‘삼국지’ 기록에는 이와 같이 적고 있다. 

‘조식이 옥산에 올라 동아에 이르러 한숨 지으며 장막을 치고 무덤으로 삼았고, 절망에 가득 차 어산땅(鱼山这一托身之地)에 의지하다 세상을 떠났다.’ 

1951년 핑옌성 문물관리위원회에 위산에 오랫동안 버려져 심하게 훼손된 고분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사해 보니 벽돌구조로 된 무덤에 부장품도 있었으나 묘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가 1977년 약 3m 높이의 묘벽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였다. 명문에는 ‘태화 7년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연주 태수 주씨 가문에서 200명을 파견하여 능을 건설하였고, 그 보상으로 각 사람이 200일 동안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태화 7년은 조식이 죽은 다음 해이고, 여러 부품이 조식의 신원과 일치하므로 국가중요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이후 산문, 비각, 비림, 자건사(子建祠) 등을 재건하여 현재는 수문제 개황(开皇)13년(593)에 제작되었던 조식의 묘비도 옮겨 놓았다. 무덤 옆에는 범음동굴이 있고, 음주기구, 옥 장식 등, 조식이 사용했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몇 안 되는 삼국시기 고분으로 유명세를 타자, 대만과 일본 승단의 참배가 더러 있었으나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대의 승려 도세(道世)는 ‘법원주림’ 34권 ‘패찬편’에서 “조식의 정밀한 생각은 어산의 범창(梵唱)을 감득했고…(중략)…천궁의 기운을 본따 청아한 소리로 사계(詞契)를 지어 높여 절문(節文)으로 드러내었으니, 이를 신응(神應)의 징조요 학자의 모범”으로 칭송하고 있다. 남송의 문인 조령운(趙靈雲)은 “세상의 모든 문필가 중에 조식에 비할 자가 없다”고 하였고, 청나라 시인 왕시진(王士禛)은 조식(曹植), 이백(秦白), 소식(蘇施)을 ‘불멸의 인재’로 꼽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조식의 어산범패를 국가무형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하여 중국불교음악의 시조로 삼고 있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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