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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당사(1) - 구마라집의 역경 도량

기자명 오동환

영어의 생활 끝 당도한 장안서 만개한 역경 불사

7세 출가 각국 유행하며 모든 학문 섭렵…중원까지 명성 떨쳐
규봉산 앞 초당사,  너른 공간까지 역경·수행 최적의 환경 갖춰
현존 구마라집 대표 역경처…‘금강경’ 등 총 74부 380권 한역

1)초당사 대비전에 눈이 내렸다. 본래 대웅전이었으나, 중수불사 후 그 앞에 대웅전을 따로 짓고, 현재 이 곳에는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산문과 함께 청대의 건축이 보존된 유적이다. 2)사리탑 전각 앞에 세워진 구마라집상. 쿠차의 키질석굴에 조각된 젊은 구마라집상과 비교된다. 노년에 이르러서야 장안에서 역경불사에 임한 세월이 투영되었다.

역사상 최고의 역경승을 꼽자면 단연 구마라집 삼장(343-413)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번역한 유려한 문체의 경전들은 이후 동아시아 불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수많은 역경 불사는 대부분 장안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시안에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그의 숨결을 유유히 전하는 사찰이 남아있으니, 바로 초당사(草堂寺)이다. 초당사는 시 중심에서 서남으로 약 35km 떨어진 후이취(鄠邑區)의 읍내에 자리한다. 산문(山門)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삼론종조정(三論宗祖庭)”이란 비문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구마라집을 비조로 하는 삼론종의 시원임을 밝히고 있다. 사찰 내에는 구마라집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고, 그간에 이곳을 다녀간 인사들이 남긴 비문들이 진열되어, 사찰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구마라집의 위대한 불연이 어떻게 장안까지 닿았을까? 구자국의 국사였던 아버지 구마라염(鳩摩羅炎)과 국왕의 누이동생 기바(耆婆)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다. 이후 각국을 유행하며 소승과 대승, 심지어 외도의 학문들을 모두 섭렵하였으니, 그 명성이 일찌감치 서역 전역에 퍼지고 급기야 멀리 중원에까지 미쳤다.

“서역에는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에는 도안(道安)이 있다.”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던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은 그를 수도 장안으로 모시길 원했다. 마침 선선국과 전부국이 구자국과 언기국 등 서역정벌을 제안하며 군사를 요청하자(382년), 부견은 군사 7만을 보내며 장수 여광에게 분부하였다. 

“구자국을 정복하면, 급히 역말을 달려 구마라집부터 후송하라.”

그러나 부견은 끝내 그를 만나지 못했다. 여광이 구자국을 정벌하는 사이, 관중에서 흥기한 요장이 부견을 참살하고 후진(後秦)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광은 양주(涼州)에서 후량(後涼)을 세우고 구마라집을 곁에 두었지만, 불교에 관심이 없던 여광과 그 아들들은 구마라집을 오로지 길흉을 잘 보는 점술가로 대우할 뿐이었다. ‘고승전’은 구마라집이 양주에서 당한 갖은 능욕과 핍박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구마라집의 운신이 여의치 않았음은 이 시기 역경이나 불교적 교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방증한다. 401년에 후진의 요흥이 후량을 정복하고 구마라집을 국사로 모시게 되자, 비로소 그는 양주에서 약 17년간 사실상 영어의 생활을 마치고 장안에 당도하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장안에서 구마라집의 불사는 주로 서명각·소요원·‘대사(大寺)’ 이 세 곳에서 행해졌다. 그렇다면 그중 초당사는 어디일까? 서명각에 대한 정보는 현재 전하는 바가 없지만, 소요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된다. 소요원(逍遙園)은 송대 이후의 기록에서 초당사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소요원은 장안성의 북쪽에 자리하였으니, 지리상 당대 도성의 서남 교외에 자리한 초당사일 리가 없다. 수대에 편찬된 ‘역대삼보기’에서는, “삼천의 대덕승이 이곳 ‘대사’에 모여, 요진왕의 공양을 받았다. 세간에서 칭하는 ‘대사(大寺)’는 본이름이 아니다. 사찰 중에 전당을 짓고 용마름[草苫]으로 지붕을 삼았다. 이곳과 소요원에서 역경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대사’가 곧 초당사의 전신이며 소요원과 함께 구마라집이 역경을 한 주요 장소임을 밝히고 있다. 

이때의 초당사가 현재 후이취에 자리한 초당사인가? 구마라집 역경처로서의 초당사는 ‘위서(魏書)’ ‘진서(晉書)’ ‘구당서’ 등등 역대의 사서에서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옛것을 중수한건지 당대(唐代)에 새로 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구마라집의 사리탑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각지에서 모여든 3000의 승려를 수용하자면, 초당사는 도성 밖의 너른 공간에 자리하였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초당사는 영산 종남산의 줄기인 규봉산을 앞두고 있어, 역경과 수행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다. 사찰중수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불두(佛頭) 없는 석불은 그 양식적 특징을 볼 때, 초당사의 역사가 적어도 북위 시대까지 거슬러감을 시사한다. 인근에 옛부터 존속한 ‘라집촌’의 ‘라집사(羅什寺)’는 이 지역과 구마라집의 오랜 인연을 방증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구마라집 역경처의 랜드마크로서, 초당사의 지위는 확고하다. 

환갑을 앞두고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은 마치 막혔던 분화구가 폭발하듯 다량의 경전을 끊임없이 역출하였다. ‘금강경’, ‘대품반야경’, ‘유마경’, ‘아미타경’, ‘법화경’, ‘미륵경’ 등 오늘날까지 애독되는 소의경전들을 포함하여, 총 74부 380권의 경율논서들을 한역하였다(‘개원석교록’). 그중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삼론과 ‘대지도론’, ‘성실론’ 등의 논서들은 구마라집의 중관사상이 반영된 역경의 결과물로서, 승조-고구려 승랑-길장으로 이어지는 삼론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구마라집 사리탑. 주재료인 옥석을 조각하고 연마해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세월을 견디는 단단함이 전해진다. 양식상 당대에 제작. 또는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마라집 사리탑. 주재료인 옥석을 조각하고 연마해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세월을 견디는 단단함이 전해진다. 양식상 당대에 제작. 또는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마라집 삼장이 413년 약 70세의 나이로 열반하실 때, “나의 번역에 잘못됨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하였으니, 과연 그 말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암송한 경전의 십분의 일도 채 번역하지 못하였다 하니, 양주에서 묶인 17년의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약 그 세월의 숙성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여전히 감화를 일으키는 희대의 역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다만 탑전에 고개 숙여 감사와 존숭의 예를 올릴 뿐이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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