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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지식인 효당 최범술의 삶·사상 재조명

  • 불서
  • 입력 2024.01.23 17:49
  • 호수 1713
  • 댓글 0

효당 최범술의 불교와 차도
채정복 지음/민족사/592쪽/5만7000원

일제강점기서 해방 이후까지 효당의 생전 자료 등 총망라
독립운동·정치인·차문화 복원 활동 등을 체계적으로 규명

효당 최범술은 스님이자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이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다. 또한 원효학 연구로 한국불교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현대 차 문화를 개척한 다도인으로 꼽힌다. 그렇기에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책은 실천적 지식인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던 효당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연구서다. 효당의 맏제자로 사천 다솔사에서 평생 그를 시봉해 왔던 저자는 효당의 생전 자료를 총망라해 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새롭게 조명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근대화의 격동기를 거친 효당의 삶을 연구하면서 그의 학문적 지향점이 ‘국학’으로 귀결됐음을 강조한다. 단순히 전통의 계승이 아닌, 근대기 민족적 자아의 재발견을 위해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1904년 음력 5월,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효당은 일곱 살 되던 해 사립 개진학교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항일의지를 보였다. 특히 조선어 대신 일어를 배우고, 일본 왕의 사진에 매일 같이 예를 갖춰야 하는 학교교육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3학년이 됐을 무렵 그는 난폭한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고 이를 위해 동맹휴학을 모의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강제 퇴학을 당했고, 이후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한 뒤 당숙의 서당에서 사서(四書)를 배웠다. 

효당이 불연을 맺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14세 되던 해 신심 깊었던 부친을 따라 다솔사를 찾았다가 그곳에 있던 한 스님의 경전 독송을 듣고 크게 발심해 해인사에서 환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지방학림에서 초월·월우·월주·포광 스님 등 뛰어난 강백들로부터  불교 사상을 익힌 그는 구국을 위한 항일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특히 초청강연회에서 만해 스님과의 만남은 그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해인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 등사 책임자로 대구까지 이동해 미농지를 구입,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배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효당은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영화로 잘 알려진 ‘박열’과 함께 흑우회(불령선인회)에 가입, 일본 천황 암살을 위해 중국 상해에서 폭탄을 가져오기도 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일본 내에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효당은 불교청년운동과 식민지 체제 극복을 위해 만해 스님이 조직한 만당(卍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이어 나갔다. 
 

효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였으며 원효학 연구와 전통 차문화를 복원한 뛰어난 학자였다. 그는 1937년 해인사에서 인경도감을 맡아 고려대장경 인경을 완료했다. 인경 불사 당시 효당(왼쪽 두번째)의 모습.
효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였으며 원효학 연구와 전통 차문화를 복원한 뛰어난 학자였다. 그는 1937년 해인사에서 인경도감을 맡아 고려대장경 인경을 완료했다. 인경 불사 당시 효당(왼쪽 두번째)의 모습.

국내로 돌아온 효당은 1937년 해인사에서 인경도감을 맡아 ‘고려대장경’ 인경을 완료했고, 장경판고에 방치돼 온 국간판과 사간판 등 1만 1391판을 정리해 ‘해인사 사간 루판 목록’을 완성했다. 원효 스님의 ‘십문화쟁론’, 고려 ‘대각국사문집’, 의상 스님의 ‘백화도량발원문’ 등이 세상에 공개된 것도 이때였다. 

해방 이후 1947년 해인사 주지에 선출된 효당은 후학양성을 위해 해공 신익희와 더불어 국민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 1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사천 삼천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를 통해 헌법의 기초를 닦았으며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발의하는 등 국가재건에 앞장섰다. 1959년부터는 원효 스님 저술 및 교학연구에 매진하면서 원효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1962년 원효불교교단을 설립하고 다솔사를 원효불교 근본도량으로 선포, 원효 스님과 만해 스님의 사상 계승 및 선양에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 전통 제다법을 복원한 초의 선사 선양에도 매진했다. 다솔사에 차나무를 심어 차를 직접 만들고 ‘한국의 차도’를 저술해 사장돼 가던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특히 “차도에는 들어가거나 나오는 문이 따로 없다”는 ‘차도무문(茶道無門)’을 강조하면서 차문화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며 학자로, 독립운동가로, 전통 차문화 복원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효당은 1979년 7월 원적에 들었다. 

책은 효당의 혁혁한 업적과 그의 일생에 걸친 활동 전체와 그 성격, 지향점까지를 체계적으로 규명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713호 / 2024년 1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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