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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법’이 불가피한 이유…연기의 눈으로 본 세상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24.01.29 12:04
  • 수정 2024.01.29 14:05
  • 호수 1715
  • 댓글 2

[특별기고]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가 1월26일 기고를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고 대표는 지구온난화 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 부산 네트워크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국제 채식연합회(IVU)를 대표해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편집자

녹색당은 2020년 학교급식법 시행규칙 ‘식단 작성 시 고려해야 할 사항’에 “채식하는 학생을 위한 내용이 없다”며 “공공급식에서 채식선택권을 보장하는 입법 조치를 하지 않은 입법부작위는 자기 결정권, 건강권, 환경권을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채식선택권이 없는 군대나 교도소 내의 급식이 양심과 신념을 위협한다는 인권위 진정에는 이미 차별 금지 등 인권 차원에서 사회적 응답을 확인하고 상당한 개선을 이룬 바 있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학교의 경우 식단 작성과 급식은 학교장의 재량이고, 따라서 채식선택권이 없는 건 법률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뤄지는 기본권 침해가 아니라며 청구를 각하했다.

비건을 차별로부터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영국의 평등법은 ‘채식은 윤리적 목적부터 건강 관리를 위한 선택, 개인의 선호에 이르기까지 그 이유가 너무 다양해 하나의 ‘신념’보다 ‘생활양식’에 더 가깝지만 반면에 비건은 종교나 성적 지향같이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받을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비건은 채식주의자와 달리 대부분 동물권과 기후변화 때문에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유제품 등 일체의 육류 소비를 거부하며 일관된 실천을 하기 때문이다.

비건 즉 윤리적 채식주의를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신념으로 존중하는 데서 더 나아가 아예 어떤 형태이든 비건 채식을 법이나 제도로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 이걸 가칭 ‘비건법’이라 이름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전 지구적인 식습관 전환이 불가피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문제의 원인이 된 사고방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놓고 생명과 자연을 도구로만 여기는 세계관은 우리 본연의 연민과 자각을 축소하고 마비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관이다. 비건 채식은 단지 음식의 전환이 아니라 사고방식 즉 세계관의 전환이다. 생명과 자연의 신성함과 경외심을 일깨워 인간을 본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혁명이다.  [한국 채식문화원]
문제의 원인이 된 사고방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놓고 생명과 자연을 도구로만 여기는 세계관은 우리 본연의 연민과 자각을 축소하고 마비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관이다. 비건 채식은 단지 음식의 전환이 아니라 사고방식 즉 세계관의 전환이다. 생명과 자연의 신성함과 경외심을 일깨워 인간을 본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혁명이다.  [한국 채식문화원]

첫째, 무엇보다 비건 채식이 ‘기후 적응’ 측면에서도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기후 위기의 임계점을 방치해 기후재앙이 현실화된 이후에는 고기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데다, 그때는 고기가 낭비하는 물과 배출하는 다량의 온실가스, 그리고 세계 자원에 대한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인해 육식이 받아들이지 못할 행위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견되는 그런 상황이 안 오도록 꽉 막힌 에너지 전환과 지구 회복력 복원에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도 비건 채식에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작년 9월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덴마크·독일 등 8개국 29명의 과학자가 2000건 가량의 연구를 토대로 지구의 건강 상태를 진단한 결과가 발표됐다. 9가지 지구 위험 한계선 중 기후변화·생물 다양성·토지 변화·담수 변화·질소와 인의 부영양화·새로운 화학물질 등 6가지가 위험 한계선을 넘어섰고, 해양 산성화와 대기 오염, 오존층 변화는 안전 기준 범위에 들었다. 지구 시스템의 9가지 영역은 상호 연결돼 있어 기후 위기를 해결하려면 기후뿐 아니라 다른 지표들도 한계선 내에서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 9가지 영역의 지표 가운데 하나라도 임계점을 벗어나면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연쇄 효과로 회복력을 완전히 상실해 인류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축산업은 기후변화와 생물 다양성뿐 아니라 9개 지표와 관련한 토지와 담수 변화, 화학비료로 인한 질소·인의 순환, 대기 오염 등의 최대 원인 제공자다. 비건 채식은 지구 위험 한계선을 벗어난 6개 지표와 나머지 3가지도 한계 내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메탄 발생을 줄임으로써 2050년 탄소 중립을 위한 에너지 전환의 시간을 상당 부분 벌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개발단계에 있는 불확실한 탄소 포집 및 제거 기술에 의존하는 것보다 사료 재배로 인한 과도한 삼림파괴와 해양자원 남용을 줄여 숲과 토양, 해양 생태계를 복원하면 온실가스를 확실하고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다.

둘째, 비건과 이코노미의 합성어인 비건노믹스의 괄목할만한 성장도 이유의 하나이다. 소설 ‘백경’이 보여주듯 불을 붙이기 위한 기름을 얻기 위해 19세기에 전 세계의 고래는 거의 멸종에 가까워질 만큼 학살당했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뉴욕의 거리는 말똥으로 뒤덮여 있었다. 포경산업의 폭주를 막은 건 한 지질학자가 석유에서 등유를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뉴욕의 말이 도심이 아닌 초원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헨리 포드가 발명한 자동차 때문이었다. 현재 시장에 의해 추진되는 대체육이나 대체유제품 개발에 각별한 관심과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대체육이나 대체유제품의 경제성이 확보되면 자연스럽게 산업 구조가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존 고기나 유제품 생산에 비해 에너지 45%, 토지 99%, 물 96%를 덜 필요로 한다.

2018년 마코 스프링만 박사가 이끄는 영국 옥스퍼드대 ‘식량의 미래에 대한 옥스퍼드마틴 프로그램’은 지구가 2050년 예상 인구인 100억 명을 지탱하려면 서구 사회가 육류 섭취를 90% 줄여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네이처’지를 통해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지구 평균 기온 상승에 대한 파리 기후협약 목표인 1.5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건 채식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주장한다. 설사 인류가 지금 당장 화석연료 사용을 멈춘다 해도 현재의 식량 생산·소비 체계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때문에 기후변화를 막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은 이 대체육과 대체유제품이 가지는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채식연합과 비건(VEGAN) 세상을 위한 시민모임 활동가 등이 지난해 12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비건 세상을 위한 50인의 기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과 비건(VEGAN) 세상을 위한 시민모임 활동가 등이 지난해 12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비건 세상을 위한 50인의 기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셋째, 비건법은 인간만을 법적 주체로 규정한 현 체계를 넘어 동식물의 권리를 규정한 ‘지구법’과 떼어 놓으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 가뭄, 태풍 등으로 지구 환경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현재의 법체계를 ‘지구 중심적’으로 전환하고 ‘지구공동체의 한 구성 종으로서 인류’의 존속을 다루기 위한 ‘지구법’이 그 대안으로 회자되고 있다. 소위 생물권이나 지구권을 헌법에 명시하게 되면 경제 개발 시 생태적 상쇄 효과도 자연스레 고려하게 될 뿐 아니라 생태적 악화가 경제 발전으로 가장될 때 시민들이 법에 호소도 가능하게 된다.

이미 2008년 생물권이나 지구권을 새로운 헌법에 통합시킨 에콰도르를 비롯해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한 독일 등 지구공동체의 공동선에 근거해 동물권뿐 아니라 생물권도 인간의 법률에 통합되어야 하는 근본적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 빠르게 뿌리내리고 있다. 유엔 ‘하모니 위드 네이처(Harmony with Nature)’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4개 이상의 국가에서 자연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019년 3월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아마존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앵무새의 권리를 인정했다. 같은 해 멕시코 대법원은 닭싸움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며 ‘동물학대와 불필요한 고통을 수반하는 어떤 관행도 헌법이 보호하는 문화적 관행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명시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기업에 법인격을 주었듯 ‘생태법인(Eco Legal Person)’ 제도를 도입해 멸종위기종인 제주 남방큰돌고래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조례 제정도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넷째, 비건법과 생명애 의식은 종이의 양면과 같다. 인류는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지구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인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미함을 체감했다. 이 두 가지 의식 변화를 바탕으로 이제 지구를 우리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우리가 이 지구에 적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문명 전환의 핵심동력이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인 생명애다. 생명애 의식의 등장은 우리가 지구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이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명체와 유대감을 형성해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건은 모든 생명을 향한 자비심과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알아차림’에 기초한다.

근대 문명을 연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만 해도 자연과 동물을 ‘영혼 없는 자동 장치’라 여겼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개를 마구 때렸으며 고통을 느끼는 듯 몸부림치는 생명에 동정심을 느끼는 이들을 비웃었다. 매 맞을 때 내는 비명은 마치 시계 속에 있는 작은 스프링의 소음일 뿐, 몸 전체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여성과 흑인은 도덕적인 공동체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 노예를 회초리로 때려 고통을 주어도 불법이 아니었다.

인간과 자연 생명을 별개로 생각하는 이 근대적 세계관에서 오늘 같은 미증유의 위기가 비롯되었다. 자연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자원으로만 여겨온 현대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연결을 끊어버리고 그 결과 자연은 물론 인간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행성을 구하려면 자연 생명과 우리의 원초적 연결을 의식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인류의 정신을 형성한 종교적·철학적 전통에서 인간과 자연 생명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할 길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종교와 영적 전통은 자연 생명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행위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돼 있으며 상호연결과 연민의 원리를 그 핵심으로 이야기한다.

공자는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황금률(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을 선언했다. 이는 단지 인간관계의 덕목이 아니라 만물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자기의 욕심 많고 편협한 요구를 체계적으로 옆으로 밀어놓음으로써 자연 세계와 생명의 신성함과 외경을 통찰할 수 있다.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 불교와 힌두교,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의 핵심에도 표현은 다소 달라도 이 황금률이 놓여있다. 불교의 경우, 연기법의 눈으로 보면 만물은 모두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함께 연기하고 있는 한 몸으로, 살생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되고 거짓말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황금률은 이렇듯 한 생명 한 존재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둘이 아님’의 윤리이며 모든 생명이 화합하여 공존하는 원리이다.

생명애 의식의 등장은 인류사회에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열어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중하고 모든 생명은 신성하며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물 종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생명의 그물을 찢어놓는다면 그 덫은 곧 우리의 존재 자체에 구멍을 뚫어놓는 짓이 된다는 인식이다. ‘음식을 선택하는 인식의 질’은 이러한 인식을 체화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연구원 공동대표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연구원 공동대표

비건적 삶의 동기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이다. 외면적으로는 ‘비건’이라 부르지만 사실 상호연관성에 대한 자각과 연민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생명애에 기반하여 가능하면 기후재앙이 닥치기 전에 전 지구적인 식습관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지구공동체가 디자인되길 기대한다. 비건과 비건을 장려하는 소위 가칭 ‘비건법’은 이 세상과 인류, 다음 세대, 동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1715호 / 2024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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