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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나

연말연시에 학생들과 함께 인도 불적지 순례를 했다. 과거와 현재, 신과 인간,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인도는 혼돈 그 자체였다. 무리한 일정을 따르다 보니 독감에 걸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평소 그렇게도 원했던 성지순례를 하게 되어 비록 상비약과 침대 신세를 졌지만, 어떻게든 2600년 전 석존의 숨결과 자취를 느끼고자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분리된 심신 때문에 그간 공부해 오면서 상상했던 성지의 모습과 현실과의 간극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의문을 증폭시켰다.

특히 부다가야의 마하보디대탑에서는 시야의 광경 자체가 의문으로 변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대탑의 위용은 물론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폭탄테러를 경계하며 소지품마저 보관해야 하는 실정을 대하며, 현실은 평화를 갈망하지만 갈등과 증오가 세계화되는 단면을 보았다. 마침 달라이라마가 다녀간 다음날에 방문한 터라 대탑 주변에는 티베트 승려들과 신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인도불교의 계승자라고 자처하는 티베트가 처한 국난을 불력을 빌려 극복하고자 하는 그 염원이 간절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냉혹한 국제질서는 과연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민중의 목숨은 감정 없는 숫자로만 계산된다. 절규하는 생명의 고통은 남의 일이 되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선한 의지가 과연 어떻게 악을 극복하고 튼튼한 벽사(辟邪)의 성을 구축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가 생겼다.        

과연 성지순례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계기이자 성자의 혼을 자기화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전환점이 된다고 한다. 인도의 현실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잡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성지는 관광지로 변하고, 소박했던 옛 성자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석존이 성도하기 전까지 수행했던 전정각산을 올라갈 때, 달리트(불가촉천민)들의 그 휑한 눈망울들을 잊을 수가 없다. 누더기 몇 조각을 몸에 두르고 희망을 상실한 눈빛으로 부르튼 두 손을 벌리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들이 과연 성자가 나신 땅의 사람들인가, 전륜성왕인 아쇼카왕이 불법으로 다스리던 나라란 말인가.   

불법은 힌두교의 세계에 포섭되면서 마침내 12세기 인도에서 소멸되고 만다. 인도에서 불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면 이들도 과연 석존의 후손으로 평등한 삶을 구가하지 않았을까. 인도의 독립과 함께 카스트제도는 사라졌지만 관습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리안족이 원주민을 정복하면서 계급화했던 아득한 옛날의 반인륜적 행위가 여전히 인도 전역에 판치고 있다. 일억 명도 넘는 그들은 인도의 가장 더럽고 구석진 곳에 내버려져 있다. 불교의 평등주의는 인류를 하나의 가족으로 엮기에 충분했다. 석존은 인간의 행동 여하에 따라 자신의 계급이 된다고 설했다. 불성을 지닌 존재가 태생에 의해 사회계급에 예속되는 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때가 언제란 말인가. 이러한 불평등은 자본에 의한 심화된 계급화로 이제 지구 전체를 덮고 있다. 무명과 무지의 결과다. 현실의 차별상을 무력화시키는 무아의 교설이야말로 언제나 불타오르는 혁명의 불씨다. 

바라나시에서 보았던 그 강렬한 화장의 현장은 헛된 제도와 관습, 욕망과 자기현시, 인류의 분열과 갈등이 부질없음을 보여주었다. 왜 석존이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에서 초전법륜을 굴리셨는가. 실존의 죽음 때문이다. 무여열반의 회신멸지를 강조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화장은 죽은 지 하루 만에 이뤄진다. 덜 탄 시신을 장작불 안으로 밀어 넣는 화부의 손놀림은 그저 육신이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에 불과했다. 무상 앞에서 육신의 역사와 희로애락의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불어 살아가는 연기의 절대적인 시공간 속에서 인류는 안식을 위한 영원한 법신의 강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의 불덩이가 나를 덮은 성지순례였다.

원영상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wonyosa@naver.com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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