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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환상의 세계에 사는 환술사

최고 환술사는 자기까지 속이는 범부의 ‘마음’

환상 세계에서 사는 진짜 주인공은 환상 지어내는 환술사
일체가 마음이 가짜 이름으로 그려낸 환상인 줄 알면 현자
자신이 지어낸 환상을 실재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면 범부

연꽃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환 같은 형상은 무수히 많다. 불교도들은 연꽃이라는 이름에서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토를 떠올릴 수 있다.
연꽃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환 같은 형상은 무수히 많다. 불교도들은 연꽃이라는 이름에서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토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새해 들어 ‘가짜[假]’라는 주제와 연관된 몇 편의 글을 연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것이 그 두 번째 글이다. 이전 것을 건너뛰고도 매회의 글이 그 자체로 이해되면 좋겠다. 그래서 이후로도 이전 내용을 종종 반복하게 될 것 같다.

이번에는 환상(幻狀)의 세계와 그곳의 환술사(幻術師)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어떤 교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설대로 세상을 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또한 거기서 고통의 근원과 그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저 가짜에 관한 학설을 받아들인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환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다 환상으로 간주된다. 또 ‘나’라는 것도 하나의 환상을 대표하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온갖 환상을 지어내는 어떤 환술사가 그 세계의 진정한 일원으로 등장한다. 이번 글은 그 목격담 중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불교도에게는 이 세상이 마치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하는 말이 그리 특별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한 번쯤 이런 문구를 읊조리거나 들은 적이 있으리라. “모든 유위법(有爲法,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어다.”(‘금강경’ 마지막 게송) 내가 말하는 환상의 세계도 그 덧없고 무상한 세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만약 누군가 모든 것이 허깨비 같다고 깊이 느끼고 있다면, 그는 그 세계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만약 그가 ‘세상의 모든 이름은 다 가짜이고, 그 가짜 이름으로 가리켜진 대상은 자기 마음이 현현해 낸 환상일 뿐’이라고 관하게 된다면, 저 환상 세계의 특징이 더 명료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밤이 되면 더욱 빛을 발하는 도심 뒷골목의 상점들처럼, 내가 그 풍취를 느껴보려고 찾아다니면 보이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나는 저 환상의 세계의 문 앞에서 그 안을 엿보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내가 본 인상깊은 장면 하나를 말해보려 한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저 환상의 세계를 관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 철학적 기조에 기울어져 있다. 유명론과 관념론. 그 이론들이 저 환상의 본성을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환상’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상, 아무래도 그 이론적 배경도 잠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철학 이론이 낯설게 여겨져도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 불교도라면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미륵의 후예들과 한배를 탄 사람들은 처음엔 유명론에 심취했다가 결국엔 관념론에 정착한다. 그러니 먼저 저 환상의 세계가 유명론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본래 가짜 이름으로 그 자체로는 빈 이름에 불과하다. 하나의 이름에 딱 들어맞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나의 이름은 서로 유사한 수많은 것들을 가리킬 수 있다. 가령 ‘연꽃’이라는 이름은 아주 밀접한 유사성을 띤 일군의 꽃들을 가리키고, 때로는 그 꽃들과 희미한 유사성을 띤 일군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가리킬 수 있다. 내지는 거대한 유사성 안에서 우주 전체를 상징하기 위해 ‘연꽃’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유명론자의 관점으로 저 환상의 세계를 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세상을 관하는 사람은 범부가 아닌 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가령 그가 저 ‘연꽃’이라는 하나의 이름이 종횡무진 옮겨 다니며 수많은 환상을 그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는 것을 깊이 관찰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또한 자기 마음이 ‘사자’의 형상을 인식하거나 ‘부처’의 형상을 인식하거나 ‘진여’의 형상을 인식한다 해도 그것이 다 가짜임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 형상들은 자기의 마음이 ‘사자’나 ‘부처’나 ‘진여’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려낸 언어적 환영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빈 이름을 어떤 실체와 동일시하게 될까 염려하면서 ‘금강경’의 문구를 자주 떠올릴지도 모른다. 가령 그가 의사 소통 과정에서 ‘세계’라는 단어를 발성했다면,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이런 후렴구를 떠올린다. “내가 말하는 세계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미륵의 후예들의 명단 안에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무착(無著)·세친(世親) 형제가 그 경전에 심취한 사람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미륵의 후예들이 결국엔 관념론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말해보려 한다. 그들이 사상적 근거로 삼는 한 경전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가령 능숙한 환술사가…풀잎·나무토막·기왓조각·조약돌 등을 모아놓고, 갖가지 환 같은 사물들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해심밀경’의 ‘승의제상품’) 이것은 환상의 세계에서 매번 벌어지는 상황의 본질을 비유한 것이다. 이곳에는 능숙한 환술사가 살고 있다. 그는 환 같은 사물을 나타내는 데 쓰려고 나무토막 등을 잔뜩 모아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각종의 환 같은 사물들(코끼리, 수레, 보석, 곡식 등)을 능수능란하게 지어낸다. 미륵의 후예에게 그 세 가지가 비유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환술사란 환상의 세계를 지어내는 진정한 주인공인 ‘식(識)’을 비유한다. 모아놓은 나무토막 등이란 ‘식’ 안에 내재 된 언어[名言]를 비유한다. 나무토막 등 상에서 환처럼 나타나는 사물의 형상이란 바로 ‘식’에 현현된 언어적 환영들을 비유한다. 그러니까 저 환상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 환술사는 대부분 범부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는 필시 자기가 보았거나 들었던 대로 그 환상들이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이런저런 말장난[戲論]을 끝도 없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환술사에게도 언젠가 모든 것이 허깨비 같다는 자각이 일어나겠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만은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저 환상의 세계를 꿈꾸지만, 자기가 꿈꾸는 줄도 모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환술사는 매 순간 환상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현자로 살아가지만, 어떤 환술사는 자기가 만들어 낸 환상에 스스로 속아서 범부로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최고의 환술사는 자기가 만든 환상마저도 저절로 현현했다거나 자연히 생겨났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것이 바로 범부의 ‘마음’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환술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다음의 글은 그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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