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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사성제 관찰 위빠사나명상–1

기자명 일중 스님

사성제는 가장 큰 법의 그릇

‘나’를 명료하게 직시하면
괴로움 벗어날 출구 보여
괴로움을 받아들임이 출발
평정심으로 오온 관찰해야

“사성제(四聖諦)가 위빠사나 명상법이라고?”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렇다. 사성제는 법념처 명상법의 하나로 ‘대념처경(D22)’에 분명하게 제시됐다. ‘이것이 괴로움이구나!’라고 분명하고 꿰뚫어 알라고 한다. 즉 괴로움을 경험할 때마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관찰하라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실천법도 분명하게 마음챙기면서 관찰해야 한다. 현재 이 순간 몸과 마음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관찰하고 통찰하여 바르게 깨달아야 할 법과 진리가 바로 사성제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사성제는 ‘법의 심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가장 간결 명료하게 체계화시킨 사상체계이자 수행체계라고 할 수 있다.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M28)’에서 밝힌 것처럼, 사성제는 또한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큰 법의 그릇이다. 12연기를 포함한 모든 선법이 다 사성제에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억겁의 세월 동안 생사윤회를 치달리며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사성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종종 말씀하신다. 사성제를 깨달으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진리를 깨달으면 범부가 성자 종성으로 전환된다. 이렇듯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 여부는 범부와 성자를 구분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가 열반을 증득하여 멸성제를 성취하면, 사성제가 완료되고 완성이 되는 것이다. 

사성제에서 한 번 짚어볼 중요한 개념은 ‘진리(眞理), 제(諦)’라는 용어이다. 진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진리는 빨리어로 삿짜(sacca)이다. 이 삿짜의 어근은 √as(to be)인데, ‘~있다, ~이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가졌다. 이 어근이 파생하여 명사가 되면 ‘진실, 진리, 사실, 실제’가 되고, 형용사로 쓰이면 ‘존재하는, 진실한, 사실인, 실제인’의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어원적으로 살펴볼 때, 진리는 허구이거나 가상이 아니다. 개념이나 관념도 아니다. 우리 존재계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사실이고 진실이며, 실재하고 존재하는 경험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생로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가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지 않던가. 진리는 결코 보이지 않는 먼 곳이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나(I)’라는 존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명료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출구가 보인다. 그럼 ‘대념처경’에서 설명하는 사성제 관찰명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인용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성제는 괴로움(苦, dukkha)을 중심축으로 한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실천방법이 괴로움의 네 가지 측면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조건에 따라 매우 논리적이고 완벽한 구조로 설계됐다.

첫 번째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명상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꿰뚫어 알라는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괴로움을 경험할 때마다 수행자는 ‘이것이 괴로움이구나’라고 분명하게 마음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탓하거나 부정하고 저항하기 쉽다. 또는 집착으로 나타나거나 자기 질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 괴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혜롭게 감내하면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려야 한다. 탐진치로 반응하기보다는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성성적적하게 오온을 관찰하고 통찰하여 지혜를 성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괴로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satiupekkha@hanmail.net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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