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 도봉산 영국사지

기자명 임석규

조선 세종 때 중창돼 세조 축수재 봉행했던 사찰

도봉서원 복원사업 발굴조사서 ‘영국사’ 옛 터 밝혀져
고려 초 혜거국사 비석 파편·불교의례용품 69점 출현
국내 최초 발굴현장 출토 ‘건칠불상’ 수습은 난항 거듭

 

도봉산 영국사지 전경.

문화재청은 2021년 8월 24일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10점을 보물로 지정했다. 금동금강저(1점), 금동금강령(1점), 청동현향로(1점), 청동향합(1점), 청동숟가락(3점), 청동굽다리 그릇(1점), 청동유개호(1점), 청동동이(1점) 등이다.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은 조선시대 유학자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중심 건물지로 추정되는 제5호 건물지의 기단 아래에서 2012년 수습됐다. 조선시대 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서원 건물의 흔적을 찾는 조사를 하던 중 보물급 불교 공양구가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이후 서원이 있었던 조선시대 지층보다 더 아래쪽에 있었을 사찰의 흔적을 확인하고자 불교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추가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도중 고려 초기 고승 혜거국사(慧炬國師) 홍소(弘炤, 899∼974) 스님의 비석 파편이 발견되었고, 비문의 내용 중 ‘견주도봉산영국사’(見州道峯山寧國寺)라는 명문이 판독됨에 따라 이곳이 ‘영국사(寧國寺)’의 옛 터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로써 도봉서원이 영국사 터 위에 건립된 사실과 발굴지에서 수습된 금속공예품은 바로 영국사에서 사용한 고려시대 불교의식용 공예품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도봉산 영국사에서’란 시에서 영국사의 쇠락한 풍경을 시로 남겼다. 

“…층층의 옛 탑은 부질없이 하얗게 서 있고 / 글자 없는 조각난 비는 풀에 반쯤 묻혔네.”

도봉산에 있었다는 영국사는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에는 ‘영국사터’로만 기록된다. 영국사는 조선 세종 때 중창되었으며 진관사에서 올리던 수륙재를 이곳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거나 세조의 축수재를 봉행하는 등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었다. 

이렇게 사격 높은 사찰이 있던 터 위에 1573년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배향하는 서원이 건립된 것이다. 율곡 이이는 ‘도봉서원기’에 “…양주읍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도봉산이 있고 거기에 영국동이 있는데 옛날에 영국사가 있다가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선생이 어릴 때 이곳의 천석을 무척 좋아하여 왕래하며 휴식하였고…” 라고 창건 경위를 남겼다. 

이후 많은 문인들이 서원과 계곡을 찾았고 시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전란과 자연재해로 불타거나 쓸려간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재건되었으나 1871년의 서원철폐령으로 조선의 사림정치를 대표하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병향했던 도봉서원은 사라졌다.

사라진 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지역 유림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일환으로 도봉서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서울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2011년부터 시작되었다. 2012년 발굴조사 막바지에 행해진 트렌치조사에서 영국사와 관련되었다고 추정되는 불교의례용구가 69점이나 출토되면서 학계와 불교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출현으로 도봉서원 복원사업은 잠정적으로 중지되었다. 이후 도봉서원과 새롭게 발견된 영국사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2017년부터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추가조사에서는 조선시대 도봉서원의 건물지와 부속시설은 물론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법등을 이어왔던 도봉산 영국사의 건물지들과 영역 범위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 가장 큰 성과는 탁본으로만 전해지던 ‘견주도봉산영국사 혜거국사비’의 실물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이 비편을 통해 우리는 이 유적이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계시던 영국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사지서 출토된 청동의례구. [서울문화유산연구원] 
영국사지서 출토된 청동의례구. [서울문화유산연구원] 

그밖에 2014년 보고서에서 ‘암각비편’으로 보고되었던 유물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석각 천자문’과 ‘묘법연화경 석경’임을 확인하였다. 새롭게 발견된 청동제 공양구들이나 명문이 있는 석조유물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보도가 있었고 일부는 전문가들의 학술연구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영국사지 출토품 중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유물이 한 점 더 있으니 바로 ‘건칠불상(乾漆佛像)’이다. 

건칠불상은 6호 건물지의 아궁이 폐기층에서 불상의 단면이 지표면에 드러난 채 출토되었다. 노출된 단면을 육안으로 관찰한 결과 일부에서 금박과 검은 칠 도막, 회칠층, 섬유층 등이 관찰되었다. 섬유질의 층수는 5~6층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 불상이 건칠불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현장에서 건칠불상이 출토된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21점 밖에 발견되지 않은 건칠불상이 영국사지 발굴현장에서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놀랍고 기쁜 사건이었지만 흥분은 잠시뿐이었다. 노출된 불상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불상의 형태가 온전하지 않았고 불상 주변 곳곳에 기와 조각이 박혀 있는 등 수습 단계부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불상 내부에는 흙이 채워져 있었는데 다행히 이 흙 덕분에 불상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흙은 충분한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형태가 유지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 불상을 수습하여 흙을 제거하게 되면 형태 유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뿐만아니라 흙을 제거하는 단계에서부터 불상의 뼈대라 할 수 있는 섬유층을 보존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으로 판단되었다.

영국사지 건칠불좌상. [불교문화재연구소]

즉 자칫 잘못하면 섬유질은 사라지고 바깥쪽 칠층만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될 경우 불상을 노출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맡게 되는 기관의 책임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국내에서는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건칠불상을 수습하여 보존처리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보존방안과 방침을 세우는 단계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고민 끝에 발굴단은 당시 건칠불상의 형태를 최대한 남기기 위해 불상 주변의 흙과 기와에 대한 표면 강화 작업을 한 후 수습하여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어디로 이동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어느 기관도 선뜻 심하게 손상된 건칠불상을 수리하겠다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noalin@daum.net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