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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68)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4)

의상 관련된 낙산사 관음설화는 신라 관음신앙의 특수성 담은 지문

신라의 최초 관음신앙 사례는 선덕여왕 당시의 자장 출생 설화
삼국유사 속 관음신앙 대부분은 법화경 보문품에 의거한 기복
낙산사 설화만이 화엄경 입법계품에 따른 구도적인 성격 강해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 정원본 40권화엄경 중에서  첫번째 장과 마지막 장의 목판본.[동국대 불교학술원]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 정원본 40권화엄경 중에서  첫번째 장과 마지막 장의 목판본.[동국대 불교학술원]

3회에 걸쳐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와 익장(益莊)이 찬술한 ‘낙산사기문’(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조)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의상이 낙산사의 창건조사로 등장하는 연기설화는 역사적 사실성이 결여된 설화적 허구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음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이 설화의 내용은 사실성이 결여됐기 때문에 불교사 자료로서 폐기해버릴 무가치한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비록 의상의 관음신앙 자체를 이해하는 자료로서는 당연히 제외되어야 하겠지만, 의상 이후 그의 불교가 전승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불교사 연구의 자료로서는 또 다른 의미가 없지 않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역사적 사실성이 결여된 설화가 성립되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불교사의 연구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의상의 낙산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성립시키는 역사적 배경으로서 우선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특수성을 지적하고, 이어 의상의 관음신앙의 특징으로서 전해진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 바위굴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진신상주(眞身常住) 신앙의 전거가 되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수용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관음신앙이 한반도에 전래 된 것은 삼국시대인 6세기 전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그에 관한 자료로 전해진 것이 없다. 신라에서 최초의 관음신앙 사례는 선덕여왕대(632~647) 활약했던 자장의 출생에 관련된 설화이다. 즉 자장의 아버지 소판 무림이 아들을 얻기 위해 삼보에 귀의하고 관음상 1천 부의 조성을 서원하여 불탄 일에 자장을 낳았기 때문에 선종랑(善宗郞)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법화경 보문품’에 의거한 현실 구제적인 관음신앙은 6세기 말 즈음에는 신라에 수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음신앙이 널리 유행한 것은 삼국 통일기인 7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김인문(629~694)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통일전쟁 중 당나라에서 외교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670년 신라와 당 사이의 군사적 충돌로 당에 억류되어 돌아오기 어렵게 되자, 신라에서는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인용사에 관음도량을 만들어 기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에서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에 신라에서는 미타도량으로 바꾸어 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살아서는 현실 구제적인 관음신앙이 죽은 뒤에는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미타신앙으로 연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대 이후 100여 년간 관음신앙의 영험한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중요한 사례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대 경주 남항사의 11면관음화상은 비구니의 몸을 나투어 유식학자인 경흥의 우울병을 낫게 하였고, 효소왕대 백률사의 대비상(大悲像)은 사문의 몸을 나투어 다른 나라 땅에 잡혀간 국선 부례랑과 낭도 안상을 살아서 돌아오게 하였다. 경덕왕대 분황사의 천수대비화상은 희명이라는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였고, 민장사의 관음상은 이승(異僧)의 몸을 나투어 해난을 당하여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가난한 여인의 아들인 장춘을 다른 나라 땅에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수도할 곳을 찾는 신효거사에게는 노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거주할 곳을 알려주었다. 

또한 서방왕생을 기약하여 수도하던 광덕과 엄장에게는 19응신의 하나로 분황사의 노비였던 광덕의 아내가 되어 두 사람이 도를 이루는 것을 도왔으며, 백월산에서 수도하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게는 여인의 몸을 나투어 미륵과 아미타불로 성불토록 도와주었다. 9세기 이후의 사례로는 낙산사의 관음이 욕정에 사로잡힌 조신으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깨닫고 수도승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중생사의 대비상은 후사를 구하는 최은함에게 아들(최승로)을 낳게 하고, 또한 그 갓난아이를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인한 난리 중에 보름 남짓이나 보호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상 열거한 사례들은 모두 관음의 응현(應現)과 영험(靈驗)의 사실을 전해주는 이야기들로써 현실성이 적은 허황되고 괴탄한 내용이지만, 당시 신라인들로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해결을 바라는 절실한 현세기복적 신앙의 소산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중생들이 물과 불, 악귀나 도적 등의 일곱 가지 어려움에 처했거나 자식을 갖고자 하는 등의 온갖 현실적인 바람을 가졌을 때, 일심으로 관음보살을 부르면 모두 들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관음신앙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어려움의 해결을 바라는 절실한 욕구에 부응하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신앙 사례들은 현실적인 고난을 해결하는 현세기복적 성격의 신앙이 중심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타정토에로의 왕생과 연결된 내세적 성격의 신앙도 나타내주고 있었다. 이는 신라의 관음신앙이 ‘법화경 보문품’에 의거한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미타신앙의 유행에 수반하여 미타정토 왕생을 보조하는 내세적 성격의 관음신앙도 공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지어 진신상주 신앙의 연기설화를 낳게 한 낙산사의 관음보살도 9세기 중반 이후에는 욕정에 사로잡힌 수도승을 깨우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하는 설화를 전해주게 하였다. 

그런데 오직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에서 전해주는 진신상주 신앙은 현세 구복적인 성격의 관음신앙과는 명확하게 성격을 달리하는 구도적인 성격의 신앙으로써 신라의 관음신앙 가운데서는 매우 이색적인 것이었다. 진신상주 신앙의 전거인 ‘화엄경 입법계품’은 장자의 아들인 선재(善財,Sudhana)라고 하는 한 구도자가 “보살도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품고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차례로 52인의 선지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자비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만나 진리의 세계인 법계에 들어가는 보살행을 완성한다는 구도의 이야기를 설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선재의 구도행각에서 28번째로 만나는 선지식이 바로 관음보살로서 인도 남쪽 해안에 있는 보타락가(補陀落迦,Potalaka)가 그의 상주처라고 하는데, 낙산사의 창건연기설화에서는 바로 신라의 바닷가에 그 보타락가의 실재 장소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관음보살이 신라 땅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진신상주 신앙을 성립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에서의 관음진신상주 신앙의 성립과정에 대한 이해는 그 경전적 근거인 ‘화엄경 입법계품’의 전래과정과 연결시켜 추구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4세기 중엽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편찬된 이후 중국에 전해져서 여러 차례 한역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반도에도 여러 차례 전래 되어 왔다. 그 가운데 ‘화엄경’의 부분역인 경전들이나 ‘60화엄경’(418~420한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래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인해주는 자료는 전연 없다. 643년 귀국한 자장이 ‘화엄경’을 신봉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성은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역시 신라 불교계에서는 670년에 귀국한 의상이 자신의 저술인 ‘일승법계도’와 함께 ‘화엄경’을 강의함으로써 실제적인 이해가 추구되기에 이르렀으며, 원효도 의상의 소개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0여 년 뒤인 690년대 초에 승전의 귀국을 계기로 하여 법장의 화엄 관계 저술들이 전래됨으로써 ‘화엄경’ 연구는 크게 진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0화엄경’(695~699한역)은 아직 이루어지기 전이었으므로 전래될 수 없었다. 법장(643~712)은 중인도에서 온 지바가라(地婆訶羅,Divākara)가 가져온 ‘화엄경 입법계품’의 범본에 의거하여 ‘60화엄경’의 ‘입법계품’을 보충하였으며, ‘80화엄경’을 한역할 때는 필수로서 참여하였고, 그리고 ‘80화엄경’을 직접 강의하고 주석을 추진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으며, ‘80화엄경’이 곧바로 신라에 전해졌다는 자료도 없다. 현재 전하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80화엄경’의 전래가 확인된 것은 755년의 사경 발문을 통해서인데, 그 이전인 700년대 전반기에는 이미 전래되었고, 중반기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도 사경이 이루어질 정도로 상당히 넓게 유포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그러나 702년에 입적한 의상이 ‘80화엄경’을 직접 접했을지는 의문시되며, ‘80화엄경’의 한역이 이루어지기 전인 681년에 입적한 원효는 말할 것도 없고, 의상도 종전의 ‘60화엄경’에 시종 의거했던 것으로 본다. 

다음에 ‘80화엄경’에 대한 징관(738~839)의 주석서들과 함께 새로 번역된 ‘40화엄경’이 신라에 전래 된 것은 799년 범수(梵修)의 귀국을 통해서였다. 징관은 784년 ‘80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소’ 20권, 이에 대한 복주인 ‘화엄경수소연의초’ 40권을 저술하였고, 796~798년 ‘40화엄경’이 새로 번역될 때는 상정(詳定)의 임무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40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들도 저술하였다. 이러한 ‘화엄경’의 한역과 신라에의 전래과정을 종합하여 볼 때 ‘80화엄경’은 700년대 전반, 그리고 ‘40화엄경’은 799년에 전래됨으로서 800년대 초에는 이전의 ‘60화엄경’과 함께 이른바 한역 3본의 ‘화엄경’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전기 화엄학의 지엄과 법장, 후기 화엄학의 징관과 종밀 등에 의한 화엄 관계 주석서들도 차례로 전래되어 온 결과 원효와 의상에 의해서 일단 체계화된 신라의 화엄학은 그 발전의 토대를 더욱 넓혀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낙산사의 창건연기설화에 나타난 구도적인 진신상주신앙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화엄경’ 특히 그 신앙의 전거가 된 ‘입법계품’의 내용과 성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역 ‘화엄경’ 3본 가운데 최후에 번역된 ‘40화엄경’은 ‘60화엄경’과 ‘80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 해당되는 것이다. ‘입법계품’은 ‘60화엄경’에는 14권, ‘80화엄경’에는 21권으로 각 경전의 최후에 배당되어 있으나, ‘입법계품’만을 번역한 ‘40화엄경’에서는 이를 40권으로 크게 부연 증보되어 있다. 원래 ‘입법계품’은 인도에서 일찍 성립되어 “간다뷰유하(Gaṇḑa-vyūha)”라는 제명의 산스크리트 텍스트가 여러 종 존재하고 있으며, 간행되기도 하였다. ‘40화엄경’은 795년 남인도의 오다국왕(烏茶國王)이 산스크리트 텍스트를 전해왔고, 카슈미르 지방 출신의 반야(般若,Prajňã)가 중심이 되어 796~798년에 한역한 것인데, 화엄종의 4조 징관도 그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징관은 이어 그 주석서인 ‘정원화엄경소’10권, 그리고 ‘40화엄경’ 가운데 끝부분인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설한 행원의 내용부분(권40)을 특히 중요시하여 별도로 주석한 ‘보현행원품별행소’ 1권을 저술하였고, 화엄종의 5조 종밀도 징관의 ‘보현행원품별행소’를 다시 주석하여 ‘화엄경행원품소초’ 6권을 저술하여 유통시켰다.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그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에 징관과 종밀의 이러한 주석서들이 모두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 신라 불교계에도 곧바로 전래되어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 균여(923~973)의 ‘보현10종행원가’와 고려후기 체원(충숙왕대)의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는 바로 징관의 ‘정원화엄경소’와 ‘보현행원품별행소’에 직접적인 근거를 두고 지어진 것들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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