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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한 다실에서 깨달음의 문을 열다

  • 불서
  • 입력 2024.01.30 17:57
  • 수정 2024.01.30 17:59
  • 호수 1714
  • 댓글 0

초암다실의 미학
후루타 쇼킨 지음·이현옥 옮김/민족사/256쪽/2만2000원

“세상에 차를 마시는 사람은 많지만, 도(道)를 모르는 사람은 차에 먹힌다.” 

일본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 1521~1591)의 명언이다. 차를 마시는 다도와 득도를 위한 선의 수행이 같은 경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차는 음식이지만 음식 그 이상이다. 차 속에 수행과 깨달음, 성불로 이어지는 수행의 길이 놓여있다. 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차를 마시는 장소도 중요하다. 참선을 위해 선원이 있듯, 차를 마시는 행위가 수행이라면 차를 마시는 장소 또한 수행의 장소여야 한다. 다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다실을 초암다실(草庵茶室)이라 부른다. 차의 정신을 공간에 응축해 놓은 미적 건축물이며 체험의 장소이다. 초암(草庵)은 초암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갈대나 짚, 풀을 사용해 만든 암자이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담박한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한다. 작고 소박한 다실 공간을 미학적으로 접근해 공간 그 자체를 궁극적인 선과 불법의 세계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초암다실의 미학’은 초암이라는 공간을 통해 차와 수행의 의미를 일깨우는 책이다. ‘차(茶)와 선(禪)의 이어짐’이라는 부제에서 그 뜻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일본의 다실은 넓고 큰 다실에서 시작해 좁고 작은 다실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은 일본불교의 흐름과도 상통한다. 귀족적이고 교학적인 화려한 불교에서 군더더기를 걷어낸, 오로지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선불교로의 전환은 다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선불교가 일본불교의 특징이 됐듯이 초암다실은 작고 소박한 다실의 전형으로 일본에서 다실이라고 하면 바로 이 초암다실을 가리킨다. 이를 다른 말로 와비다실(わび茶室, 侘茶室)이라고 하며 이런 의미에서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미적 감각을 ‘와비미’라고 한다.

초암다실의 규모는 다다미 4장 반 정도의 크기다. 우리 단위로 약 2평 정도의 크기인데, 한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고시원 정도의 넓이다. 이를 장(丈)으로 계산하면 사방 한 장 정도의 크기로 유마 거사가 기거했던 방장(方丈)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마 거사가 작은 방장에 삼라만상을 담아냈다는 경전 속 가르침을 상징화한 것이다. 

초암다실은 차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무한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시에 작은 다실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속에는 와비미라고 불리는 상징들이 숨어있다. 그 상징들은 그대로 수행과 깨달음의 세계로 연결되고 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초암다실은 △선에서의 오묘한 깨달음인 무(無)의 관문을 상징하는 낮은 출입구 니지리구치 △ 속세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다실 정원 로지 △일심득도(一心得道)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나타내는 징검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감각기관을 상징하는 다실의 창 △불상을 걸어 예배했던 불당의 원형 도코노마 △마음으로 보는 세계를 상징하는 묵적(墨跡)과 묵화(墨畫) 족자 △일심득도(一心得道)의 대상이 되는 꽃 △마음의 수련 대상이 되는 물(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초암다실의 미학’은 일본의 선학자이자 불교학자인 후루타 쇼킨의 책을 번역한 것으로 미국에서는 ‘다실의 철학’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선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형이상학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런 선의 세계를 차를 통해 음미하며, 또한 초암다실이라는 건축물의 구조를 통해 시각적, 체험적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 ‘초암다실의 미학'을  또 다른 ‘선어록’이라 불러도 무방한 이유다.

김형규 전문위원 kimh@beopbo.com

[1714호 / 2024년 1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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